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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냐, 박근혜냐 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이 기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물질주의외 탈물질주의의 대결.
인간의 욕망의 가치관과 이상의 가치관 대결.
현재 한국 사회를 돌아볼 때 장덕진 교수의 진단은 적절한 것 같다. 보수나 진보나 인간 본성에 따라가면 결국 고상한 이론을 덮어쓴 욕망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니까.
진보진영의 멘붕 역시 고귀한 이상을 덮어쓴 욕망덩어리의 분출과 조작으로 벌어진 일…
재미있는 건 한국 교회도 이런 현상에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청지기적 삶은 인간의 욕망과 결합되어 놀라운 괴물을 만들어 버렸고, 한국 교회는 같이 그 괴물과 하나되고 있다.
결국 한국 사회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타고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읽기 안철수, 그 허락된 욕망[장덕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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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를 구매하면서 터치용 스타일러스펜을 구매해야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패드가 가진 성격상 세밀한 필기조작이 쉽지 않을꺼라 생각하고 오진 신의 스타일러스펜인 손가락을 잘 활용하며 읽기와 놀이로 즐겁게 활용하던 가운데...
아이패드가 무겁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가방에서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단한 스케치를 위해 스케치북을 다시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에 이것 저것 알아보던 차, "스타일러스도 간단한 스케치하는 용도론 괜찮더라"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귀가 번쩍 뜨여 알아본 결과 와콤에서 나온 이제품을 알게 되었다. 가격이 착하지 않아 고민을 했지만 다른 스타일러스들의 평을 들어보니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일찍 버리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거금을 들여 구매한 녀석이 이놈이다.
실제로 사용해 보니 필기감은 그럭저럭인거 같다. 큰 기대도 안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건 아이패드의 성질이니 그냥 그럭저럭 쓸 수 있을 듯.
실제 그림을 그리는 부분은 좀 더 가지고 놀아야겠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생각보다~~~) 스케치북만큼의 필기감이 있는 건 아니고, 종이 특성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간단한 스냅샷이나 최근에 블로그에 올리는 정도의 그림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듯 하다.

에다의 작품. 오호~~ㅇ


앞으로 이녀석과 함께 사용하게 될 app은 뱀부페이퍼와 UPAD, 그리고 스케치북X가 될 것같다. 가끔씩이지만 이녀석의 활동들을 포스팅 해 보련다. 다음달이면 볼펜과 결합한 듀오가 나온단다. 가격은 4만원대 쯤 될 듯. 흠...비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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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사람 빌닷이 말했다.
"이제 그만해라. 뭐 그리 말이 많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나. 이런 고통은 너나 네 자식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온거야!
언제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거 봤나? 혹 죄가 없다면 널 도와주시겠지.(만약이지만 말이야!)
그러면 과거보다 더 풍족하고 넘칠게 분명하네. 그리고 널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도 아작 나겠지.(만약이지만 말이야!)"

가장 보편적인 조언일 듯. 우리는 그렇게 상대의 고통을 판단하고 보편적인 권면을 한다.
하지만 세상에 가득한 악인의 창궐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한편의 좋은 설교지만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절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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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였을까? 교생선생님이 온다는 것은 단순한 일상에 일종의 신선한 바람,( 적절한 표현이다) 이었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길을 기대하는 긴장감과 두려움의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던 수업을 실제로 하고 평가하는 날은 학생들도 같이 긴장했다. 이미 몇일전부터 말을 맞춰보고 누가 질문하고 답할지, 어떤 흐름으로 갈 것인지 연습하고 습득한다. 그리고 당일이 되면 그전에 있었던 어느 수업보다 긴장되었다. 우리가 실수하면 교생선생님에게 누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다. (적어도 가때는 그런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긴장되게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마침점을 찍으면 귀에 평가하시는 선생님은 밖으로 나가시고 교생선생님은 그제서야 숨을 몰아내쉬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일종의 "교과서"적인 수업이었다. 보기좋은 하나의 오케스트라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교육"의 부분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그 당시 교사들의 장학지도에서도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배움의 흥미 대신 잘짜여진 극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쩌면 그것이 수업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실에서는 어떨까?

교사에게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하며, 수업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또 학부모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며, 국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적어도 보여지는 교사를 위한 수업은 교사들도 원치 않을 것이고, 국가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보여지는 수업이 그렇게도 중요했을까?
어쩌면 그 시대에 있어서 비슷한 형태의 일체형 수업을 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시도나 잘 보여지는 것에 대한 선호도 였을까? 아니면 우리에겐 수업에 대한 평가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그런 형태가 그 당시에 살던 우리들에게 적절한 수업모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나의 기억과 오늘의 시점에서 교육에 대한 이해를 본다면 학생이었던 나에겐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 즉 구성원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를 배웠지, 지식과 배움에 대한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추정해본다면(좀 과장되이 말하면) 당시의 학교를 정의해 본다면 지식의 배움이 일어나는 곳이라기보다는 권력과 교실 구성원, 더 나아가 선후배의 관계로 이어지는 학교 구성원들과의 관계성을 원만하게 이뤄가는 "사회 생(공)존의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연과 지연의 밀접한 관계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모두가 이해하는 교육과 학교 현장에서의 교육내용이 다르다면 우리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교육을 생각할 때,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묵인 속에 진행되는 그런 교육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화가 가속되고, 다문화로 변화되는 지금 우리에게 적합한 것인지 다시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던 내용들이 과거의 추억이 된 상황이라면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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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장 4. 12.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말했다.

"거 참 말 많네, 친구.

일주일간 울어줬고, 위로했지만 네 넋두리는 더 못듣겠다.

네가 받는 건 심판이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속속들이 찾아 심판하신다구.

우리는 모두 심판의 대상이지. 그러니 너도 네 잘못이 있으니 이런 상황까지 온거야, 이친구야!"


"그리고 절망은 직면해야 절망이라 느낀다구. 너 역시 어떤 위로나 권면을 했겠지? 그런 네가 지금의 너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고통의 절망에서 널 지웠으면 하는거니? 네 잘난 위로는 어디간게냐!"

하지만 엘리바스는 몰랐다. 하나님은 죄를 찾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욥기 5장. 4.13.
 
"자, 욥! 이제 인정하게나. 

너는 지금 너의 죄로 고통을 받고 있는게야. 너도 모를 수 있지.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는 자연스레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생기는 거야. 

그래서 겸손해지게나.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이를 지키시고 도우실걸세. 이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배운 교훈이 아닌가?

이제 깨닫게나."


하지만 엘리바스는 몰랐다. 하나님은 악의 존재와 고난의 이유가 교과서적이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람과 지극히 사적인 경험의 영역에서도 다루신다는 것을. 

그것이 종교적인 사람들이쉽게 저지르는 교만, 타인을 자신의 경험으로 재단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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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19대 국회의원 선거 현황(23:09) 참 지랄맞고 천박한 색깔이다."


그렇게 터지고 찢겨진 이야기들에 국민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진보적인 사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진보라 할 수 없는 나는 "보수적 성향의 개혁적"이라는 긴 수식어로 설명하곤 한다. 그래도 부족하다.

나는 성경의 공의와 정의, 그리고 사랑과 용서가 펼쳐지는 세상이라면 그것을 꿈꾸는 이라면 그에게 표를 주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어 공의와 정의는 다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 성경구절이라도 살아온 배경과 경험이 다르면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는 바벨탑의 저주는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존재하며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권력있는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는지 모른다. 무언가 살짝 비틀거나 포장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나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때론 독재라는 정치제도가 더 신뢰할만하다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편적 국민들의 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그런 모험적인 것들이 더 매력적이긴 하다.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 이 시대가 고민하고 생각하며 또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자본"에 매인 세대다. 모든 철학과 가치는 바로 그 "자본"에 묶여있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대다. 취업을 해결해줄 수 있다면 윤리도 도덕도 가치도 철학도 모두 넘겨줄 태세다. 그렇기에 절망스럽고 올해 2012년이 그런 의미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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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겁고 고단한 인생...
열심히 살아내도 대면하는 절망에 직면한다.
슬퍼 우는게 아니라 탈출구없는 절망에 울 수 밖에 없다. 돌릴 곳없어 나에게 살을 돌린다. 저주스런 나...

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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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사랑의 나라를 꿈꾸며...


덴마크 교육을 훑어보면서 느끼는 한가지는 "현재"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기독교 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현실과 분리될 수 없는 오늘의 종교이자, 내일의 희망이다.

그렇기에 현재 벌어지는 현실의 역사적 맥락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진실에 대면하여 내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내일의 희망은 헛된 꿈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헛된 꿈은 동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의 상상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꿈은 예수님의 핏값으로 마음이 상한자가 치료함 얻고, 묶인자가 놓임을 받고, 죄로 묶이고 손가락질 받던 이들이 자유를 얻으며, 슬픈 이들이 위로함을 받는 것이다. 그날은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불의가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한 꿈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그날의 꿈이다.



그렇기에 오늘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넘고, 민족주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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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I stand....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요즘처럼 자신의 이야기와 성향을 이야기하는 적을 그리 본적이 없다. 지난 3년을 돌아보면서 요즘만큼 치열하게 상대에 대한 강한 비난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마도 선거의 열기 때문이리라...
이 양분된 분위기에 내 페친(99%가 기독인이다.)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만 듣기 거북한 강성의 글들(양진영에서)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훑어보면 어쩔 수 없는 친미성향의 신학과 일제시대 이후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자주적 토착적 신학의 성향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이데올로기가 덮어져서 친일-반공-친미 성향의 전통적 기독교와 반일-반외세-친민족의 성향 기독교로 크게 두가지로 분할되어 오늘까지 왔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단순히 신학적인 이분법으로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노태우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연속성은 일종의 국가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각 성향이 좀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문민정부의 등장은 무너진 이데올로기로 덧칠함으로 한국 사회의 방어기재를 작동시켰고, 기독교에 있어서도 사회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문제는 사회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청년들의 반발은 이데올로기로 자기를 지켜왔던 세대에 대한 반동이자, 약자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담게 된다. 그러면서 유교적 전통을 깨뜨리며 기성세대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다. 이는 전통적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전통적 기독교(소위 보수 기독교)의 21세기 열매는 대형교회의 프렌차이즈와 지도자들의 타락, 재산문제, 교회내/교단의 싸움으로 얼룩진 것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수치를 감추며(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라며) 이런 지적을 공격으로 여기며 악의 세력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을 함으로 그동안 기득권을 지켜왔던 이들과 연대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

반대로 민족주의적 신학은 지난 40년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싸잡아 비난당하고 매장당하고 더 나아가 국가의 폭력에 노출되어 고난을 당했다. 이런 이들의 연대는 정치적 노선의 연합이라기 보다는 상한자들간의 연대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노선의 인물들은 이런 연대를 활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폭력의 방법으로 저항하도록 요구했고, 지난 세기의 국가간의 폭력들로 얼룩진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운동에 대한 아는바가 없어서 자세히 기술하기는 어렵지만 중남미의 정치적 상황과 민중신학의 대두는 앞에서 짧게 언급했던 민족주의적 신학이 걸어간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배경들을 통해서 본다면 분명히 사회의 전통적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정당할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 근본주의 신학을 고려한다면 진부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의 평가를 받는 건 나같은 보수적 기독교인에게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이자 서기관일테니까.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진보적 추종자들을 향해서도 일갈을 날린다. "내 나라는 여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지럽힌 질서를 바로잡고, 정죄하는 일이었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곧 오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다. 그것을 위해 예수를 추종하며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들이 바랬던 하나님 나라가 곧 오리라 믿으며 그 믿음의 정점이라 생각했던 예루살렘의 입성을 목도하며 흥분했던 그들은 곧 예수의 배신을 목도하며 의심한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땅에 발을 딛고 저주받은 사이에서 생산된 것들을 먹으며 살던 이들의 꿈꾸는 세상과는 다른 것을 확인하면서 절망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하루를 앞둔 이 나라를 보며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양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보여주시진 않을까?

이 상황에 있어보니 의외의 인물 가룟유다가 생각난다. 어쩌면 제자들 가운데 가장 의식있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고...
어쩌면 은화 30이라는 장치에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 치우져졌는지 모를 일이다.

이 밤을 생각하니 그에게 동정심이 생긴다. 이 시대를 살아내는 가룟유다들이 있다면 자신의 달려가는 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인내한다면 예수님의 진실을 보게 될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그게 나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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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 1955-2011. by Barny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기사. 
고등교육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적어도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선 애플이라는 기업의 전통과 철학을 이어주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대학에 동의하고 애플에 입사한 Joel Podolny에게 있어서는 기업의 리더십과 창출에 대한 교육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잡스가 없는 애플을 여전히 애플스럽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인지 모르겠다.
잡스는 이전에도 시도했던 내부 대학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며, 이미 픽사(우리가 잘아는 토이스토리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에는 픽사대학을 세워 진행하고 있다.
 

잡스는 애플의 철학을 만들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애플을 애플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고등교육을 정의한 셈이랄까? 
우리에게 있어 대학이란 전통과 철학을 규명하고 우리를 우리답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름 흥미있는 이야기다. 



링크보러가기

원문 일부... "스티브는 자신의 유산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애플에 대한 사항을 유전자화시켜서 미래 애플 직원들이 배울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자신이 어째서 성공했는지의 뿌리를 깊게 파고들 수 있도록 대학까지 세우는 회사는 없죠."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복귀한 이래 애플을 실리콘밸리 역사상 제일 주목할만한 부활사례로 만들어 놓았다. 10년 이상 그는 아이포드에서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애플이 내놓은 모든 히트작에서 중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는 음악 청취와 오락물 시청 방법은 물론, 아예 전체 산업의 조망을 바꿔서 애플을 세계에서 제일 가치 놓은 회사로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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