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블로그 이미지
바니의 이야기- MK(선교사자녀)/TCK(재외국민자녀들)를 이해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한국 교육이 다문화 사회를 지향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공간입니다. barny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21)
Edge of Life/삶의 언.. (81)
Edu4christianity (96)
Chritianity & Mission (97)
사각풍경 (18)
멀하니?(hard/multi) (24)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이 세상의 좋은 친구보다
나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귀한 분~~

이 찬양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나의 부요함을 구하고, 좋은 동지를 구하며, 나의 꿈을 노래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나 역시 더 좋고, 편한 것으로 무장되면 그분의 나라가 곧 올거란 착각과 속임 속에 기도하며 일하는 때를 자주 대면한다. 풍요로움이 우리의 복이 되어야 함에도 우리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미련함과 탐욕이다.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올라온 아제르바이젠의 기도제목을 보면서, 한철호 선교사가 올린 동북아 관련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에게 던지는 질문과 교훈은 바로 부요함으로 "망할"신학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망할"신학에 물들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된장할...

주님, 나로 "망할" 신학에 퇴적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헛된 "망할"신학에서 거룩함과 온전함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Michael W. Smith를 처음 알게 된 것은 "Secret Ambition"이었습니다. 그곡을 처음 듣게 된 것은 하이텔에 있었던 CCMG라는 그룹의 정모에서였습니다. 최재혁 군의 소개로 Michael W. Smith의 곡을 처음 만났고, 그 첫 노래가 바로 이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당시 교회의 교리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주 모임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으로 만나게 된 뮤직비디오는 "This is your time"입니다.
이 노래는 사연이 있는데요. 1999년에 있었던 콜롬바인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 사건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기초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두 정신병자(라고 기사에 나와 있습니다만)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사건입니다. 13명이 죽고 24명이 부상한 이 사건에서 사망한 캐시버날(당시 17세)의 일화가 바로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됩니다. Michael은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추모곡을 불렀고, 그해 나온 앨범의 타이틀이 바로 "This is your time"입니다.


이 두 노래는 제가 CCM이라는 장르를 알게 해주고, 또 뮤직비디오가 주는 감동을 새롭게 해 주었던 것들입니다. 두 곡은 꽤 오랜 시간적인 갭이 있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4년 정도의 시간 차(크지 않다는 의미로)속에서 만난 터라 Michael에 대한 좋은 인상을 굳혀 주었습니다. 이후에 그의 20주기 기념 앨범과 Above all 과 같은 앨범을 아마존에서 직접 구매하는 팬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의 20주년 기념 앨범에는 live 실황이 담긴 DVD가 같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현재의 이야기와 상황이지만 그 속에는 역사가 담겨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저는 인생이 하나의 "역사"라는 설명을 참 좋아하는데, 많은 것들과의 만남과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금의 신앙을 이뤄가는데 95년에 만났던 CCM은 예배곡 너머로 우리의 일상을 노래하는 노래가 있고, 또 그 역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저의 신앙 고백을 끌어내고, 그 노래의 가사를 기도로 올려드렸던 흔적들이 바로 저의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의 나에게 과거의 이야기는 단순히 지금을 다져준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 격려와 채찍을 주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위 두곡이 바로 저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여러 사람을 기억나게 하고, 그 시절의 감흥과 저의 신앙을 만나도록 이끕니다. 그때 정말 순수하게 반응했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이야기는 가끔 희미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흔적은 부드러워지지만 분명히 남아 있다. 

어떤 흔적은 나를 미소짓게 하지만,
어떤 흔적은 눈물 흐르게 만들고, 
때론 부끄러워 감추려 한다. 

감추려 하면 할 수록
흔적은 더욱 선명해지고
도드라진다. 
눈물 흐르는 흔적은
점점 매워지지만
얼룩으로 영원히 남는다.

그것이 인생이며, 이야기란다. 
나 역시 40년의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교육은 어떤 목표를 두어야 할까?
여기 하나의 모델을 말하고 싶다. 교육 이론이 아닌 한 사람이다.
한국 교육 환경을 듣고 한국에 와서 경험하고 그것을 바꾸려는 작은 움직임을 친구들과 만들었다. 미국 소녀 Kelley Katzennmeyer의 다규멘터리.
예전에 "하자센터'에서 학생들이 학교외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움직임을 보고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그런 움직임을 정상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특이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그들에게 의미를 만들고 삶의 이유를 주지만 세상은 그런 모습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많은 이야기를 풀고 싶은 것은 아니니... 켈리의 시선과 마음의 움직임에 따른 결정, 그런 선택을 받아준 부모님,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회의 관용도를 말하고 싶다. 이것들은 오늘 한국 사회가 갖고 있지 않은 배려이자 가장 중요한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로 줄일 수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개인의 존중보다 사회적 질서(비록 부정적일지라도)를 지키는 것이 더 가치있어 보이는 것 같다. 무엇보다 기득권이 보여주는 욕심은 그 기득권을 쟁취하려는 이들의 욕심과 충돌한다. (물론 근원적으로 볼때 둘 다 똑같은 인간의 욕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환경을 제공한 첫 원인자는 분명 기득권이다.) 그런 사회에서 기득권이 자신의 안정을 만들어가는 기반인 모더니즘과 이데오르기, 자본, 세계화 등의 요소들은 오늘의 교육 형태를 만들고, 강화시키고 있다. 그 속에서 성장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 미래를 거세당하고, 사회의 순응만을 요구한다. 아마도 그런 곳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는 것은 내부적 폭발, 즉 게임, 폭력, 일탈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스스로를 "루저"라 부른다. 
교육은 각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는 장이어야 한다. 각 아이들에게 있을 가치와 가능성은 경제적 가치가 아닌 한 생명의 가치이자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가치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예측가능한 어떤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야 할 우리의 연속적인 이야기다. 그렇기에 켈리가 선택한 길은 그녀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녀와 이어진 다른 한국 고3 아이들의 이야기이며, 가치를 실현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사회를 기대하고, 그 이야기에 자신의 참여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켈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켈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아이들도 저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면 위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39 Kelley Katzenmeyer from mosaicist.net on Vimeo.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나는 어떤 신앙인이건 그 신앙의 진정성은 그 개인의 고백과 삶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고 때론 그것이 나의 몫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을 대면하며 그와 연관된 한 목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신앙은 무엇이며 용서는 무엇이고 또 그건 어디서 올까? 궁금해 진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아들을 잃고, 그 아들을 빼앗아간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찾아갔을때, 이미 유괴범이 누리는 평화를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영상을 보며 우리는 진짜 용서와 신앙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자에게 있어서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잃지 않고서는 모른다.
용서란 가해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진정한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연 가해자들은 진정한 용서의 과정(예수는 그 순서를 첫번째는 피해자요, 두번째는 창조주로 가르친다. [각주:1])을 밟았는지 의문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진정성에 있어서도 도마에 오를 수 밖에 없다.
한국 사회(특히 기독교 사회)는 과거의 상처를 기독교로 포장하여 신앙의 진정성조차 엎어버리거나 뭉게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역사적으로 일제 시대와 남북분단(한국전쟁을 포함해서)의 상황은 한국 교회의 큰 상처를 남겼다. 교회와 교회, 교회와 사회, 사회와 사회의 날카로운 충돌은 신앙적 이슈조차 사회/정치적 이슈와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으며, 그 속에서 용서는 단순하게 한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로 확대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화해란 무엇인가?
그 첫번째는 화목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목제는 깨어진 관계자들이 하나님의 제단앞에 와서 제물을 드리고, 같이 먹으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그 관계 회복의 근거이자 증인으로 하나님을 두는 의미의 행위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그 댓가는 화목제물이다. 그러나 그 전에 상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율법이 먼저 이야기하는 보상이 있다. 이것은 지불되어야만 하는 댓가이다. 그 이후로 화목을 위한 제사가 필요한 것이다. 또 그가 벌인 죄에 대해서는 속죄제를 또 드려야 한다. 하나의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는데에는 복잡한 절차와 댓가를 요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관계가 담고 있는 가치가 얼마나 중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참 귀한 댓가를 지불했다. 바로 두번째 "화해"의 주제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일 것이다. 그분의 죽음에 있어서 요한과 바울은 "화목제물[각주:2]"로 표현했다. 구약에서의 화목제는 가해자가 그 주체가 되지만 신약에서의 화목제는 오히려 피해자가 주체가 된다. 

이 두가지의 핵심은 화목을 위한 댓가지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제사에서는 가해자의 화목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계약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이 방법을 제공하셨고, 그 가해자인 인간의 상황에 적절하도록 주신 것이다. 두번째 제사는 피해자측에서의 화복 방법이다. 즉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것으로 가해자의 기소사실을 무너뜨림으로 관계의 기초를 새롭게 한 것이다.


과거 '고문기술자'라 불리운 목사의 경이로운 신앙적 체험과 고백을 쉬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보여준 모습으로 인한 의심은 위에서 언급했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경적인 두가지 부분과 연결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해했던 이들의 입장으로 가해의 현장으로 내려가 본 적은 없었던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국가의 정체성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 정당성을 부여하였음을 인터뷰에서 발포했더라.
물론 여기에는 분명 기독교의 초기부터 있었던 신성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이 오늘날 민주주의/자유 시장이 지지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현 시점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오히려 맘몬이즘의 현상이 기독교계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타락을 부추기고 있는 시스템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단지 사회주의에 비해 종교적 관용도가 높을 뿐이지, 체제에 대한 비판의 면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기독교의 이종배합과도 같은 우상숭배는 여기저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그 목사에게 있어서 용서와 화해란 어떤 것이며, 신앙과 목회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신학적 차이를 십분 이해해도 그가 말하는 신앙은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예수의 삶과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음이 나에겐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교회의 대표성을 자칭하는 기관의 모습들과 교회내 소송이 오고가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지나오면서 한국 기독교가 말하는 진짜 가치와 진정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태도가 그런 목사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노선의 문제로 보는 것보다 보다 근보적인 질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기독교인의 나태함과 이기주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종교적인 교회를 분리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며, 그가 민주주의에 어떤 공헌을 끼쳤는지, 그의 실제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 관련된 어떤 분이 자칭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목사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한번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 목사의 진정성을 생각하는 이 행위는 사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어르신들의 위선을 접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역겨움과 동시에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또 그들의 가르침에 침착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경고로 여겨지게 된다.
금년 한해 유독 안타까운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또 2011년을 보내는 끝자락에 한 정치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와 연관되어 한국 교회가 송장냄새를 내고 있다는 역겨움에 글을 써 본다. 

  1.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마태복음 5:23~24 [본문으로]
  2.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4:10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image

분류없음 / 2011/12/25 01:16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1. 9학년제 초등학교와 4-9년의 담임선생님.

2. 10학년으로 넘어가기 전 진로 선택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에프터 스쿨 30일과 진로 교육
3. 학생이 주도할 수 있도록 코치해주는 선생님들
4.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사회 분위기

교육이란 무엇인지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덴마크의 교육은 생존과 삶의 질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 초등교육의 긴 9년 동안 한 선생님과의 지속적인 담임 관계는 아이의 특성과 재능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학교의 역할과 일종의 방과후 학교의 기능을 분리하여 역할을 다르게 두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학교에서의 역할은 지속적인 관계를 통한 교육이라면 방과후 학교는 보다 실제적인 기술부분으로 선택가능한 일종의 자율형 선택식 수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지속적인 학생의 관리가 한 곳에서 이뤄지고 그에 따른 부족한 영역들은 마을, 도시 단위의 공동체 자원들(자원봉사 교사 역할, 교육 환경, 장소 등)을 통해 보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에 있어서 전제되는 것은 사회적인 안정과 동시에 직업에 대한 사회 보장이 이뤄지거나 최소한의 생존선을 제공되는 것에 있다. 물론 직업에 대한 계급이 적어도 시민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분위기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정 내부에서의 존중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덴마크가 완전한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교육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무한경쟁이라는 생존의 발길질이 지닌 사회적 위화감이나 탈락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탈락자들이 없도록 배려하는 덴마크의 분위기는 함께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 구성을 이뤄가도록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도 덴마크 교육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무엇보다 소명에 따른 직업 선택과 직업의 평등성, 경쟁보다 상생이라는 측면에서 교회는 많은 부분을 한국 사회의 경쟁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불러줘도, 성적으로 평가되고, 대학으로 그 학생의 가치를 대할 때 그 위선으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덴마크의 교육을 볼 때 신앙과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는 인본주의적인 냄새를 느낀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가치는 한국 교회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가치에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역설에 우리는 주목하고 회심해야 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중앙일보 2011. 12. 12. 
토플 꾸준히 응시+영어면접 연습+시사상식 정리


내신/수능 성적 없이 대학 합격. 고보민(숙대 합격)/함예은(이대 합격) 학생은 부모와 함께 홍콩에서 몇년을 보내야 했던 이들은 국내 대학에 진학할 때 그들이 지닌 장점을 활용하여 대입에 성공한 케이스다. 
이들이 국내에 돌아와서 좋은 내신을 받지 못하고 성적도 쉬빚 않았기때문에 이들이 가장 자신있는 어학특기자 전형으로 도전하였다. 

"토플성적과 영어 면접이 중접적인 평가요소였다." 수능 최저 학력을 요구하지 않음으로 수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플과 토익에 몰입하였고, 적절한 성적을 만든 뒤 면접준비를 하였다. 면접 준비는 스터디 그룹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술과 자신감을 쌓았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말하기, 쓰기를 기본적으로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만 TCK들이 지닌 장점, 해외에서의 경험과 생각하기 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준비할 때, 한국의 토픽을 좀 더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뉴스를 자주 접하고 그에 따른 사설을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것이 국내에서 준비하는데 필요한 부분이 되리라 생각한다.

자세한 것은 기사 전문을 읽어 보세요.
기사 전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한국에 살면서 교육을 보노라면 컨베이어 벨트로 찍어내는 근대교육의 종말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교실의 학생들은 그들이 가진 흥미와 자발성을 유도할만한 요소들이 떨어진다. 먹고 살기 편한데 교육이 만들어줄 미래의 불확실성에 기댈 필요가 없기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 필요한 자원은 근대교육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수많은 취업학원과 대학내의 면학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도서관에서 대학생들이 무엇을 공부하는지 살펴보면... )
하지만,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만나는 교육을 보노라면 그나마 그런 교육으로 인하여 도래될 밝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거기에는 생존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어갈 다양한 직업군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근대교육의 산물인 의무교육이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열악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결과로 다양한 직업군에 필요한 지식의 기초적인 부분은 일반 근대교육의 과정과 직업교육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의 열기는 높다. 일단 교육을 받으면 집 밖에서의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국가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근대교육 모델은 개발도상국가에게 특히 학생들 스스로가 교육열이 불타는 이들에게 아직도 유효하지만 자발성이 떨어지는 선진국가에서는 다른 형태의 교육(창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두 지역에서 이뤄져야할 교육의 가증 큰 공통분모는 자발성이다. 교육은 자발성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발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교육 모델은 의외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개발도상국가는 건물과 교사 부족이 교육을 지원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최근 교육연구가들에 의해 실험된 것들에 의하면 배우는 것보다 가르침을 통해서 교육이 당사자에게 좀 더 이득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르침의 영역이 단순히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체계화와 습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실험이 인도와 몇몇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TED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더 많은 교육 시설을 짖는 고비용적인 것보다 저비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지역별 마을별 교육 단위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교육 시스템을 실험하고 제공한다면 보다 실제적인 지식의 확산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한가지 더 첨언하자면 교육의 자발성과 더불어 사회적 공공의 이익, 공공의 선이 뒷받침될 때, 그들이 받은 교육은 건강한 공공성을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이는 교육의 결과는 실제 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더 큰 악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Rikubetsu_ginga. http://www.ustream.tv/channel/rikubetsu-ginga>


달의 월식을 지켜보며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지. 이 변화를 위해 달이 지구를 도는 속도,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속도를 합치면 이건 정말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시선이란 결국 지구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바라보는 제한적인 개미의 시선일 뿐이다. 비록 우리가 발전된 과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우리의 일반적 시선은 땅에 발을 붙인이의 제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시선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본다. 우리가 그분의 이미지로 지음받았다 해서 우리의 시선도 그분처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시선을 가질 것을 가르치셨지만, 인간은 그리고 교회는 지상의 시선에 머물기를 원했다. 

지리하게 흘러가는 달의 월식이라는 놀라운 우주쑈를 지켜보면서 우리네 변화를 광음처럼 보시는 하나님에게는 지금의 내 모습과 내 사건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밤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arny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