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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발 관용을 생각하며



관용과 관련된 유럽발 책을 보면, 서구 교회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딱 잘라 말하는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관용이라는 단어는 종교의 그늘 속에서 탄생하고 자랐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관용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적용되면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지점은 계몽주의 시기였고, 서구 교회를 비판하는 가운데서 도드라졌다는 데 있다. 관용이 사상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작동했던 시기였다. 아마도 서구 교회안에 내포되었던 관용은 현실에서 만날 수 없었던 어디까지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관념어(사실상 선전구호)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역사적으로 관용이 작동했던 계몽주의도 피상적으로 다뤄진 혐의에 있어서는 빗겨갈 수는 없다. 다만 과거에 비해 다양한 영역에서 "관용적"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지배력을 감소시킨 가운데 가능해졌다는 평가는 계몽주의의 공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과거에 비해 더 관용적인 사회로 전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관용의 측면이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믿는 인권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 관용적"이라고 해서 그 사회를 "관용적인" 사회라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교회도 이런 평가에서 빗겨갈 수 없다. 과거는 언제나 불관용일 수 밖에 없고, 오늘은 이를 근거로 관용을 생각하고 활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앞서 내린 평가들 역시 불관용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근 다문화에 관한 "포용과 관용"의 측면들이 언제나 그 일선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타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 즉 관용은 갈등을 해결하는 힘"이라는 주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사회 내부에서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던지기도 하는데, 오늘의 문제는 관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용의 의미하는 기준들, 즉 "타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측에 존재하는 "권리"에 대한 이해 차이가 서로 설득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서구의 사회 구조와 역사가 다른 측면에서가 아니라 바로 서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균열이다. 



유럽발 관용을 훑어보면서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 하나의 예를 보자면 "세월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분열된 시선의 충돌이다. 지난 2년 동안 이 하나의 문제를 지켜보면서 "타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으로 하여금 "나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함으로 "타자의 권리"를 완성시켰다. 여기에 있어 사실이라는 것도 관점과 믿음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상황도 발생되었다. 한마디로 관용 그 자체가 폭력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도 비슷하다. 특히 국내 노동자 권리와 인권을 대변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개인적으로 꽤 된다고 보는데)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른 시선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이주 노동자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고, 기업가와의 대립구도를 유지하려는 어떤 도구나 수단으로 본다. 그들에게 있어 관용이란 '나의 권리'를 상대방에게 타자의 권리로 요구하는 것이고, 이주노동자 그 자체를 자국민 노동자를 향한 기업주의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시민운동이나 사회적 정의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다문화 담론에서 그 자체의 의도나 활동을 이런 이야기로 부정하거나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가끔 듣자면 스스로의 논리적 한계에 다다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나마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다문화의 포용과 관용이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운동에서 실현하려고 애쓰는 점은 다행이랄까?

어쨌든 이런 역동적이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내용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건지 싶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상당히 자주) 다만 최근 기독교 내부의 움직임들 속에서 '이건 아닌게 확실하다'는 판단을 근거로 다양성, 공존을 생각하는데 지향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