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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선교, 교회와의 중간지대 만들기

이번 탄자니아 방문을 통해 배우는 하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나와 동역하는 교회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관한 절차를 앞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 있다. 한 문화에 오롯이 살아가는 이들과 여기에 방문하는 이들 사이에 오는 온도차를 줄여갈 수 있는 중간지대가 필요하듯 서로 동일한 목표라 생각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줄여가는 중간지대, 일종의 무장해제, 아니면 실습장과 같은 상호간에 호의가 풍성하게 존재하는 곳이 필요하다. 나에겐 교회의 선교부일 것이고, 또 지속적인 지인들과의 관계성으로 이어진 끈이다. 
나라는 존재를 단번에 신뢰하려는 곳을 뵈면 내가 먼저 움추린다. 나 역시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앞에 무장해제할만큼의 용기도 감당할 힘도 존재하지 않고, 내 결정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란 교회가 함께 한다는 그 단어를 쓰기 위해선 그 지점을 가질 수 있을 때 성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보면 너무나 쉽게 다가서고 그만큼의 상처에 몸서리치며 독을 뿜어내는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이를 계기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선교사들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선교'라는 그 목표를 의심해 보곤 한다. 서로를 돌아보는 자리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는 자리? 아쉽게도 그런 자리는 찾기 어렵다. 
교회와 선교사, 선교단체 사이의 중간지대를 넓혀가려는 욕심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명확한 중간지대가 필요할지 모른다. 단체와 교회 사이에 구별되는 특징들이 상호간에 모호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상은 그럴것이다. 나역시 교회의 호혜를 받는 입장에서 항상 빚진 마음으로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감당해야 할 짐들을 강요받는 건 거절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교회의 형편에 따르는 무리한 요구 역시 하지 않고, 공동체가 가진 질서를 최대한 배려하며 다가서려 한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욕망을 점검... 한다. 그리고 나에게 납득이 안되면, 그러나 가야하는 거라면, 교회에게 양해를 구한다.


내가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쓰고, 내 지인들과 나누는 건...
이런 저런 고민들이 이 속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분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점검하고 책임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만약 감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분이 나가는 걸 말릴 수 있는 그런 교제들이 있기를 바래서다. 나같은 사람을 격려해주면서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때로는 서로를 설득하는 그런 현장이 우리 속에 좀 더 녹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로 책임 좀 지자.'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