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2013년 11월 25일 선교사 가정에 대한 책무 관련 발표회가 온누리 교회에서 있었다. 기독일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한국 선교사 멤버케어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들을 나열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만 여명의 한국 선교사들과 이들을 보낸 한국 교회는 멤버케어라는 주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서구에 비해 한국 선교 역사는 매우 짧기 때문에 멤버케어의 미성숙함을 단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근본적으로 멤버케어를 접근하는 방식과 이해에 있어서는 불편하다. 멤버케어의 함의와 정신보다는 기능적인 접근과 문제 해결에 관심이 높고, 멤버케어가 한국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사이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선교사 멤버케어는 “타문화권 선교분야의 새로운 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주로 어떤 사태에 대한 예방적 차원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70년대 후반에 미국 선교사들을 위한 컨퍼런스 소그룹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후 선교사들의 중도탈락을 방지하는 예방과 돌봄의 과정 논의로 확장되었다. 이렇듯 멤버케어는 선교사들이 교차문화(Cross culture)에서 사역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도 이런 필요를 깨닫고, 서로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 한국해외선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최형근 박사는 “선교사 멤버케어 운동은 파송교회/선교부/파송기관들이 선교사들을 장기적으로 돌볼 수 있는 효과적인 케어 시스템 구축과 케어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김동화 박사 역시 “선교회의 리더십이 선교사역의 성과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소속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영적, 정신적, 정서적 활력과 육체적 건강을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분위기”를 만들 때 효과적으로 멤버케어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 연구자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시스템과 네트워크만으로 멤버케어가 한국 교회 환경 안에 뿌리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의 문화적 배경이 미국에서 출발한 멤버케어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도록 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015년 아시아 멤버케어 컨퍼런스에서 “중국에서 선교사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정착에 실패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전달자는 중국 교회의 내부 선교사들의 현지 정착이 실패하는 이유는 중국내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국 교회가 이들을 지원하는 의지가 없고, 무엇보다 열정은 있지만 시스템이 부재한 까닭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동일하게 한국 선교 역시 멤버케어 시스템을 장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두 나라의 상황이 무언가 연결되는 공통점을 생각하게 되었고, 다음의 전혀 다른 두 가지 사건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 하나는 한/중/일 동아시아 기독청년대회에서 발생했던 일로, 준비자들 사이에서 예상치 않았던 여러 갈등들이 발생했다. 세 나라가 안고 있는 역사적인 이슈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관심이 생긴 갈등은 한국과 일본 기독 청년들과 중국 기독 청년 사이의 기독교 문화의 문법 차이였다. 일본과 한국은 복음의 사회적 참여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큰 관심이 있었지만, 중국은 복음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었다. 중국 청년들의 태도를 듣게 되면서 1995년도에 "AD2000년까지 지역마다 교회를 사람마다 복음을"이라는 구호 속에 모였던 세계선교대회가 떠올랐다. 당시 한국 교회 청년들은 복음의 사회적 참여 대신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추구했다. 거기에는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사회, 정치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 문제가 있었고, 그 결과로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에너지를 표출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의 확산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선교의 폭발적인 동력이 되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갈 신학적 주제들은 그렇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기독 청년들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종교의 자유와 맞닿아 있고, 이를 위한 해법으로 선교를 선택한 것은 한국과 같은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1996년 케네디 경영대학원이 한국에서 온 이일세 씨를 맞이하면서 전통적인 학교 건물을 고쳤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유학 온 중증 장애인으로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학교는 그의 접근성과 필요를 위해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시스템을 고쳤다는 기사였다. 이일세 씨는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장애인을 동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정상인과 똑같이 공부하고 사회생활도 훌륭히 해내는 장애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와 경의를” 가지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런 류의 일들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그것도 외국 유학생의 필요를 위해 학교 당국이 움직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렇게 두 사건이 멤버케어와 연결되면서, 한국과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문법에 없는 것이 미국에는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연구자는 첫 째로 미국의 사회적 맥락이 미국 교회로 하여금 멤버케어를 추구할 동력을 제공했고, 둘 째로 한국의 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멤버케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공동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고찰해 보려 하는데, 연구자는 “개인주의에 근거한 다양성의 공동체 영성”이라 부를 것이다.
1. 기독교 활동의 이면에는 사회적 맥락을 담고 있다.
신앙은 사회 안에서 허락된 종교를 배경으로 그들의 신학적 진술을 만들어 간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한/중/일 동아시아 기독 청년대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중국의 경우, 전도와 개종, 교회를 세우는 것을 기독교인의 큰 덕목으로 보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 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에 반응하며 기독교적 기준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둔다. 중국은 종말적 신앙에 무게감을 두어 현대 세상에서의 환경과 삶을 변혁하는데 관심이 없지만, 일본과 한국의 경우 창조된 세상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현대 세상의 환경과 삶의 변혁에 관심이 높다. 이처럼 같은 기독교라도 각자가 속한 사회의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 따른 신앙의 가치와 진정성은 달라지고,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과로 중국은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는 헌신적이지만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에는 한국과 일본에 비해 덜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선교사와 속한 가족들이 풀어가야할 숙제이고, 삶의 질을 논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태도가 아니다는 식으로 접근된다.
이런 차이는 중국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더 나아가 서구 사회에서 돌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며, 사회적 맥락의 차이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중국 교회의 선교사 중도 탈락 이슈도 보내는 것과 돌보는 것 사이의 신학적 충돌로 설명이 가능하다.
2. 멤버케어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나온 결과다.
멤버케어 배경이 되는 미국 사회는 개인주의, 공화주의, 성서주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벨리는 평가한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공공의 철학인 공화주의와 성서에 바탕을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더불어 미국의 도덕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진술한 로버트 벨리의 말을 근거로 정수복은 개인주의와 개신교사이를 연결시킨다. 그는 개인주의를 "근대성의 필수 요소로서 초월적 신권과 절대주의적 왕권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이 자의식적인 주체가 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사상"으로 정의했다. 그 지점은 중세 왕정에서 시민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이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통한 계몽주의로 전환되는 현장이다. 이 과정은 시민 사회 형성에서 시민 개개인의 존엄과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강화하는 과정이었고, 이후로 노예제도 해방과 여성 인권, 장애인으로 확장되어 생존권과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법적 체계로 나타났다. 개인주의는 당시 교황 중심의 세계관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한 ‘만인 제사장’ 세계관으로 전환되면서 지지받을 신학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종교와 왕권의 밀월관계는 약화되면서 왕권에서 시민으로 권력이 이동하하였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국 선교에서 나타난 멤버케어를 살펴 보면 단지 선교적 성취라는 목적 성취의 도구로 여겨지기 보다는, 각 선교사들에게 발생한 필요를 반영한 활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켈리 오도넬은 멤버케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멤버케어는 선교사들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 파송기관들, 교회들, 선교사를 돕는 기관들이 하는 지속적인 투자이다. 멤버케어의 대상은 국내외 선교사들, 자녀들, 가족들을 포함한 선교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며 허입에서 은퇴까지 선교사의 전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멤버케어는 통신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선교사들의 삶이 긴 간극없이 교류되면서, 파송단체가 즉각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고려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여러 상황들이 전달되면서, 파송단체들은 성취/과제를 향한 지향점과 후원/돌봄의 필요성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선교부의 선교적 사명의 성취라는 측면이 아니라, 선교사라는 개인의 ‘전 삶’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다. 오도넬은 멤버케어를 설명하면서 “사역을 후원하기 위해 그들에게 외적 자원을 제공”한 기존의 선교 지원에서 더 나아가 “개인들 안에 잠재해 있는 내적 자원”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각 개인들은 고통/희생의 실재들과 개인의 성장/성취를 위한 일반적인 목표들 간에 균형”을 다룸으로 멤버케어는 선교사 개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주목하도록 이끈다. 선교가 갖는 대의적 목표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기존의 체제가 수정되는 전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에는 신학적인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선교사들의 생명과 삶을 생각하는 멤버케어의 정신은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미국 사회 안에서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개인의 인권과 복지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 면에서 1996년 이일세씨의 케네디 대학원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정수복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근간을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로 분석하였고, 이로 인해 파생된 것을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그리고 이중적 규범주의로 분석했다. 그 가운데 개인주의의 저해 요소로 가족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족주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연고주의를 지적한다. 연고주의는 집단주의를 부추기면서 “나”를 배제하고, “우리”만을 남게 만들었다. 독특한 것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산업화 과정은 가족주의의 해체, 개인주의 가속화를 가져왔지만, 한국에서는 그와 반대로 현세적 물질주의의 영향때문에 가족주의가 더 강화되었다고 평가한다. 그 이면에는 유교적 문화가 자리 잡고 있고, 유교적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을 집단에 소속시키고 복종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교적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살아 남았으며, 일제 강점기에서는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로, 해방이후 남한에서는 민족주의와 충효사상, 그리고 반공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형성해왔던 진보진영에서조차 집단주의의 사슬을 빗겨나가지 못했다..
이런 과정은 기독교에서도 비슷한 궤적으로 나타났다. 해방 전 신사참배 이후 강하게 나타난 친 정부적 성향은 해방 후 이승만 정부의 친 기독교적 성향과 이어지면서 집단주의적 성향을 유지했다. 물론 기독교가 가진 공동체적 입장은 집단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에서 성장한 개인의 인권과 존중이라는 측면이, 한국 사회에서는 공동체 가치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집단주의 아래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는 개인의 독자성을 ‘우리’로 대체했다. 특히 개혁주의 교회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와 목사 제도를 유교적 문화와 결합하여 신적권위와 동등하게 만들었다. 교직자들이 교회의 일을 결정하고 권위를 갖고, 평신도들은 거기에 따르는 질서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런 환경은 선교기관들에게도 동일하다. 비록 한국 사회에 비해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이들 역시 한국사회의 문화적 근간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단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선교와 교회 사이에 헤게모니 긴장이 발생한다. 선교와 관련된 멤버들이 교회의 중직에 참여하지 못하면 선교과련의 이슈는 교회 안에서 변방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교회의 실천적 방향이 선교로 집중하고, 지원을 위해서 예산편성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를 향한 욕심이 발생한다.
3. 고비용 저효율에 대한 의미와 한국적 오독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년 동안 한국교회는 서구 선교의 모델을 “고비용 저효율”이라 평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지적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한국 교회는 재정의 과다 지출에서 문제를 찾는다. 한철호 선교사는 선교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한국 선교구조를 고비용구조로 읽고, 서구 선교 베끼기, 한국 사회의 체면문화, 선교사의 책무부재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한국 문화에 내재된 현실적 물질주의와 집단주의가 가진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한다면 한철호 선교사의 체질 개선론은 타당하다. 그리고 한 선교사가 헌신하고 선교지에 나가기 전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 재정과 인력이 투자된다는 점, 현장 유지를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이 경제적인 효율성과 맞닿는 점은 일면 맞다. 하지만 한국 선교가 고비용 구조화된 이유를 서구 선교의 모방에 있다고 보고 있는 그의 평가는 적절할까? 한국 선교는 서구 선교를 모방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무엇보다 이를 이야기한 시점이 한국 선교계에서 멤버케어에 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시점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가 멤버케어를 표면화 한 시점은 켈리 오도넬의 멤버케어를 번역하는 2004년으로 보인다. 고비용 구조 비판이 등장한 최초의 기사는 2007년이고, 바로 직전에 2006년 설악포럼이 개최된 것을 보았을 때 그 즈음에 한국 선교계 체질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파송기관의 측면에서 볼 때 멤버케어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되는 지점에서 한국 선교의 고비용 구조 비판은 기관들의 재정적인 측면에서 납득할만한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선교의 고비용 구조 비판은 사실상 멤버케어를 위한 비용 증가에 직면한 한국 선교계의 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진통의 원인을 서구 선교와 같이 선교의 영역이 다양한 필요에 반응한 고비용 저효율로 맞추기보다는 만성적 내부문제인 체면문화와 책무부재에 무게를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멤버케어보다는 사역 현장의 확장에만 관심이 높았고, 재정의 흐름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분명 한철호 선교사의 주장은 멤버케어를 강조하지 말자는 의견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당시의 맥락상으로 볼 때 그렇게 읽혀졌을 가능성은 크다. 분명 한국 선교의 멤버케어는 과거에 비해 풍성하고 확장되고 있지만, 그 접근에 있어서는 제한적이고, 그 한계점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 예로 멤버케어의 한 영역인 선교사 자녀 케어, 그 가운데 교육의 영역을 짚어 보자.
선교사 멤버케어에 있어 선교사자녀의 측면에서 보자면 선교사 자녀들의 절반 이상이 선교사자녀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추정한다. 선교사자녀 학교는 국가별 정원 제한을 두는데 한국 학생 수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한국이 선교사를 보내긴 했지만 돌보는 구조를 갖지 않았고, 서구 기독교의 교육적 지원으로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서구 기독교의 쇠퇴와 지원금 감소로 인해 선교사자녀 학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학교들의 요청에 한국 교회는 반응하지 않고 있다. 이는 국내 파송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또 1993년 MK(Missionary Kids) 컨설테이션이 있고 난 후, 많은 기독교사단체들과 기독교사들이 선교사자녀 사역을 위해 지원하고 헌신했다. 그 가운데 장기 사역을 기대했던 선교사들도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철수하거나 현지인 사역으로 변경하였다. 그들이 선교사자녀 사역지에서 벗어난 이유는 한국 선교계의 무관심과 한국 교회의 인식부족, 현지 한국 선교사들의 차별대우와 갈등문제였다. 한국 선교사자녀학교들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 이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턱없이 부족해서 인근의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현지학교보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 처해 있다. 그럼에도 헌신된 교사들의 수고에 의지하여 마닐라 한국아카데미, 몽골 UBMK학교, 그리고 캄보디아 프놈펜 좋은학교들이 한국 선교를 섬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멤버케어에서 다루는 한국 선교사자녀 케어 가운데 교육 영역의 현실이다. 한국 선교사자녀에 대한 논의는 1993년에 고 데이빗 폴락(David C Pollock)과 서구 기관들의 제안으로 이뤄졌고, 그 결과로 MK사역을 위한 기관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 거론된 주제들은 지난 2013년에 발표된 선교사자녀에 대한 크림의 발표와 비교할 때 주요 이슈들은 개선된 것이 없었다. 이런 지점에서 한국 선교가 서구 선교를 모방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몇 파송기관들은 지속적으로 선교사자녀 이슈에 참여하고 개발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해결의 실마리는 그들의 손에 있지 않다는 사실 속에 MK사역에 대한 강박만 늘어가고 있다.
선교사자녀 학교의 문제는 선교사들에게 직면한 문제임과 동시에 이들을 파송한 한국 교회의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멤버케어의 측면에서 다른 이슈에 밀려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한국 교회와 단체가 멤버케어를 성과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는 한국 교회에 두 가지 의미로 전달되고 있다. 하나는 한국의 치열한 교육환경 속에서 선교사자녀들은 고비용의 국제학교를 다녀야 하는가? 이고, 또 하나는 선교사들의 성과에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다. 활용은 하되, 성과와 관련이 없으면 밀려나는 것이 한국 선교의 현실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현세 물질주의라는 입장과 비슷한 양태다. “개인적 차원”을 향한 기관들의 “지속적인 투자”라는 멤버케어의 정의와 비교할 때 멤버케어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은 있지만, 이를 움직이는 핵심가치는 찾기 힘들다.
한국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에서 멤버케어가 한 대회에서 소그룹으로 시작되어 큰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미국의 개인주의가 그 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이 멤버케어를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여기며 성과를 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 역시 한국 사회 기저에 깔린 문화적 문법들이 작동하고 있는 증거다.
4. 개선의 가능성
멤버케어가 서구의 사회적 맥락, 특히 개인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라는 지점에서 이해할 필요를 살펴보았고, 한국은 그와 반대로 집단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음을 보았다. 이런 이해의 차이가 멤버케어를 실천하는 데 있어, 한국은 집단주의라는 문법을 통해서 읽고 있어 실제로 멤버케어가 기대하는 것에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의 문화적 문법이 서양의 멤버케어를 오독하고 있다는 점, 특히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비판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분석을 통해 한국 선교를 본다면 어떤 배움이 있을까?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와 파송기관 모두 체질개선이다. 한철호 선교사의 주장처럼 선교사 책무와 더불어 체면문화로 형성된 문제들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동체의 체질 전환이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그 저변에 깔린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구조적 문제를 반드시 짚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파송기관이 보여주고 있는 목표지향적 가치에 더하여 상호 돌봄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 문법이 비록 개별성을 상실하긴 했지만 성취적 측면에서 가능했던 부분들도 존재한다.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 그 열정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2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고, 중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꿈을 실현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열정을 도울 수 있는 '상호 돌봄'을 체득하는 일이다.
2015. 6.24. 방준범
액츠 일반대학원 기독교교육 "영성과 리더십" 과제물 "선교사 멤버케어의 한국적 고찰과 개인주의적 공동체 영성의 제안"에서 발췌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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