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선포할수록 사람이 사라지는 곳,
공동체를 강조할수록 개인이 증발하는 지역 대형교회의 서글픈 모순에 대하여."
대형교회에서 마주하는 비극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겉으로는 영성을 말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여느 회사와 다름없이 목표를 위해 사람을 부품처럼 소모하곤 한다.
보통 당회와 같은 의사결정 기구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세우면, 사람을 '키워내는' 긴 호흡의 기다림보다는 이미 검증된 인력을 ‘차출’하는 손쉬운 방식을 택한다. 물론 담임목사와 교회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양상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대형교회는 청빙 과정을 통해 교회가 바라는 목사를 선택한 상황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는 자신을 뽑아준 이유를 증명하고 자신의 '쓸모'를 어필하기 위해, 빠른 시간 안에 체제를 정비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유혹에 빠진다. 결국 리더들은 이러한 행정적 우선순위를 성도들에게 주입하고, 유능한 이들을 새로운 사역에 전면 배치한다. 즉각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이 모든 과정은 ‘비전’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포장된다.
이 과정에서 소위 덜 중요하다고 치부되거나 잡음 없이 잘 성장해온 기관들은 교회의 새로운 인력 풀로 전락한다. 강제력은 없지만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자원의 형식을 빌려, 혹은 은근한 압박에 못 이겨 성도들은 자신을 사역의 현장으로 무리하게 밀어 넣는다. 결국 그 공백은 고스란히 남겨진 이들의 몫이 된다. 인력을 빼앗긴 기관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곳에서 급히 사람을 찾느라 에너지를 쏟고, ‘거룩한 부담’이라는 라벨을 붙여 누군가를 데려오지만 그 자리는 늘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인다. 새로 옮겨간 이들 역시 새 업무에 적응하며 무너져가는 친정의 눈치를 보느라 이중고를 겪는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가족 공동체’라는 가치가 리더십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헌신과 충성으로 의제를 몰아넣고, 관계의 소중함을 더 많은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라는 고귀한 상징은 정작 그 안의 ‘개인’을 증발시켜 버린다. 교회의 서사에 개인의 신앙과 삶이 희생되는, 한국 사회의 전통적 구조가 지배하는 꼴이다.
아이러니한 건 바로 그 순간에도 교회의 캐치프레이즈는 ‘공동체성 강화’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지도자 그룹이 교회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지만, 그 구호가 화려해질수록 개인의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사실 이런 방식은 오래전부터 대도시 대형교회들이 보여온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세련된 시스템과 거룩한 의미에 매료된 인재들이 끊임없이 수혈되었기에 이 방식이 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구 감소를 차치하더라도, 실추된 이미지와 기독교의 무기력함에서 비롯된 교회 규모의 축소는 더 이상 무한한 인력 풀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교회의 허리였던 이들이 ‘가나안’으로 흘러가 버린 배경에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가중된 피로감이 그들의 삶을 붕괴시킨 탓이 적지 않다. 20여 년 전 대도시에서나 보던 이 서글픈 풍경을 지금 지역에서 다시 목도하는 상황은 마치 지독한 데자뷔와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 구석구석에서는 "하나님이 하신다면..."이라는 주문 같은 외침이 들려온다. 돌들도 찬양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전매특허처럼 내세우지만, 정말 하나님이 이런 일에 움직이실까? 하나님의 관심이 진정 교회가 말하는 그 보기도 좋고 먹음직스러운 ‘하나님 나라’에만 있을까. 거창한 의문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갈아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과연 하나님이 계실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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