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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진로의 역설] 아비투스: 표준화라는 함정 속에서 공고해지는 인지적 신분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전기를 읽으며 느낀 경외감은 아마도 그의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주변의 친구들이 하이젠베르크가 기술한 대화와 진로를 찾아가는 여정에서의 인지 역량들을 보자면 혹시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탁월함은 생물학적 설계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들이 호흡하는 사회적 환경의 영향인가? 

지난 10여 년간 진로의 여정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모르겠어요”였다.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진심이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이 아이들이 사회 속에서 경외할 대상을 찾거나 되고 싶은 존재를 꿈꾸는 법을 잊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사회참여와 기여에 대한 고민 또한 그들의 자리에서 듣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를 이어가며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다. 나는 이 지독한 무력감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이런 것을 무력감이라 읽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그렇게 느껴지기에 이렇게나마 표현해 본다.) 무엇이 이들의 청소년기에서 지성적 성장의 욕구를 앗아갔는가. 과거의 지성인들이 벌이던 그 뜨거웠던 ‘지성의 축제’는 왜 점점 뒤로 밀려나거나 아예 거세되어, 아이들을 이토록 멍청한 듯 살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과거 유럽의 신분 사회에서 청소년기는 단순한 성장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완성된 성체로서 세계를 탐구하고 답을 찾아가도록 허락받은, 아니 세계를 해석해야 할 '책임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았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소년 정체성은 무엇인가. 표준화와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동일한 교육과정을 통과하는 의례 그 자체를 성장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사고하고 경로를 개척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부여된 과제를 수행함으로 각 연령별 칸막이를 넘어서는 것만으로 성인의 여정을 밟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선조들보다 자신의 욕망을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볼 기회를 아주 자연스럽게 거세당한 셈이다. 오직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이들, 표준과 효율의 문법이 필요치 않은 이들만이, 전통적인 지성의 성장을 추구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와 연결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교육의 표준화 결과는 현대 사회에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 캔 로빈슨의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아비투스(Habitus)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결정짓는 내면화된 성향을 언급했다. 계층에 따라 사고의 확장성은 누군가에게는 진공 상태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미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특정 계층은 이미 사고하는 법 자체가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타고난 기질’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문화적 환경의 총합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찰에서 인지 영역에서의 압도적 우위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천성’으로 오독한다는 점이다. 결국 탁월한 위치로 나아가는 이들의 두각은 유전자의 승리가 아니라, 그 유전자가 발휘될 수 있도록 설계된 환경의 승리다. 아니... 그것 자체가 유전자에 포함되는 것이다.

 

양육가설 | 주디스 리치 해리스

2017년 한국어판 출간 이후 수많은 양육자들의 죄책감을 덜고 해방감을 심어준 <양육가설>이 좀더 읽기 편한 모습으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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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근대화가 약속했던 기회의 평등은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함께 교묘한 신분제로 고착되었다. 과거의 신분제가 혈통으로 성장을 규정했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계층에 따른 인지적 아비투스의 차별적 분배를 통해 새로운 신분제를 공고히 한다. 표준화와 효율성이라는 견고한 시스템은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층의 아이들에게 사고의 정지를 강요하며 그들을 체제 순응적인 부품으로 길러내지만, 그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표준 너머의 지성적 축제를 여전히 향유한다.

이 거대한 양극화 속에서 중산층이 붕괴하고 대다수의 아이가 "모르겠어요"라는 무력감 뒤로 숨는 것은, 그들이 멍청해진 것이 아니라 이 견고한 표준화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한 비극적 결과다. 하이젠베르크가 누렸던 '세상을 해석할 책임'은 이제 거대 자본을 소유한 이들만의 프리미엄 상품이 되었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사고가 거세된 채 연령대별 통과의례를 밟는 '대기실의 삶'이 허락될 뿐이다. 탁월함이 특정 계층의 유전적 독점물이 된 시대, 우리는 아이들의 천성을 논하기 전에 그들을 가두고 있는 이 자본주의적 인지 감옥의 벽부터 직시해야 한다.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그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우리 시대 대표적인 과학의 고전 <부분과 전체>의 증보개정판이다. 이번 판에는 기존 판의 크고 작은 몇 개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특히 스웨덴 노벨 재단The Nobel Foundation의 호의적인 허락으로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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