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가몬( Πέργαμον, Pergamon or Pergamom 버가모)의 여정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도시 가운데 첫번째로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렌탈한 2025 버건디 푸조를 몰고 올라가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여정을 떠나기 전 사전에 공부를 했다면 내용이 더 알찼겠지만, 사역을 준비하는 한국에서나 사역을 하던 현지의 상황에서 보자면 욕심이었습니다. 라고 스스로 만족하며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페르가몬 유적 옆에 위치한 도시 베르가마(Bergama)에 이르니 월요장터가 열린 듯 입구부터 시끌벅적하고, 상수도가 터졌는지 도로는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물이 부족하다는 곳에서 홍수가 난 도로를 지나가는게 낯설었지만, 대여한 차량이니 깨끗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천천히 길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산길로 올라가 어렵지 않게 페르가몬에 도착했습니다. 8월의 페르가몬은 아침 9시가 넘는 시간임에도 뜨거운 태양에 달궈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침이라 바람이 아직 뜨겁지는 않아서 첫 여정을 상큼하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베르가마는 구석기부터 인류가 오늘날까지 거주해온 지역으로, 현재 애게 해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져 있는 내륙도시입니다. 농업 생산물과 더불어 면화에서 비롯되는 직조와 피혁 공업이 발달되어 오랫동안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이러한 잇점들 때문에 고대부터 중심도시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당시 관문도시였던 항구도시 엘라이아(Elaea, 현재 Zeytindağ(제이틴다그) 인근)가 21km의 거리에 있었으며, 내륙 분지에 세워졌으며, 뒤로는 산이 있고, 두 개의 강을 끼고 돌아서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이후로 헬레니즘과 로마, 그리고 비잔틴의 중심도시로 이어갔습니다. (참고, 브리테니카 https://www.britannica.com/place/Bergama )


입구에서 올라가는 여정은 여러 이정표들이 어지럽게 안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 신전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사도 요한이 언급한 사탄의 권좌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데, 이곳에서는 트라야누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의 동상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황제 숭배가 이뤄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묵시록에서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마치 유언과도 같은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학자들이 그 시기를 1세기 후반, 또는 2세기 초를 이야기하는데, 트라야누스 시기에 황제 숭배를 폐기하지 않음으로 기독교인을 감별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들에게 크게 3가지를 주의하는데, 그 하나는 니골라당을 경계하는 것과 두번째는 유대 회당의 핍박이고, 세번째는 황제 숭배에 대한 배교의 위협이었습니다. 1세기 후반의 소아시아 지역만의 상황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요한의 서신에서 판단할 때, 이 세 가지에서 비롯된 고난이 그 지역의 교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페르가몬의 성도에게 기독교인 감별에 따른 황제 숭배 요구로 인한 박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는 촘촘하게 이뤄진 듯 싶지만, 아쉽게도 그 흔적들은 도시 전반을 인식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이곳의 이름은 독일 베를린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과거 독일이 발굴한 유물들을 오스만 제국이 반출허가하여 생긴 일로, 신전 밑의 대제단을 그대로 복원했다고 하지요. 아무튼 이곳에서는 그 터만을 만날 수 있으며, 제우스 신전 유적은 베르가마 인근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성벽은 서머나처럼 2-3m 두께로 이뤄져 있는데, 외곽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통해서 남아 있는 성벽 일부와 무너진 성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성벽은 전쟁의 결과로 무너진 것일까요? 아니면 성벽에 씨앗을 내린 무화과가 자라면서 점점 강도를 약하게 해서 무너진 것일까요? 이곳 소아시아 여느 도시들처럼 지진으로 무너지고, 사람들이 떠난 그 자리에 목초와 나무들이 자리하여 단지 하나의 돌산처럼 묻혀 있었던 건 아닐까요? 베르가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통해서 전승되어 왔던 건 아닐가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말로만 듣던 급한 경사의 극장을 만났습니다. 와~~~ 감탄사를 낼 만큼, 그 풍경은 경이로왔습니다. 아내가 만났던 20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그 급격한 경사를 따라 내려가는게 현기증이 났습니다. 중간에 걸터 앉아 사진을 찍고 보니 자연스레 장난스러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때 배웠던 산타루치아를 불렀습니다. 30년도 더 된 시간의 기억이 소환되어 어설픈 이탈리아어 노래가 되니, 옆에 있던 이탈리아 관광객이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박수를 쳐줍니다. 어설픈 이탈리아어 노래 조차도 여기까지 놀러온 이탈리아인들을 흥겹게 만들었나 봅니다. 그렇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아리랑을 부르니 두 딸이 멀직히 도망갑니다. 창피하다구요.
그렇게 19세기의 이탈리아 노래를 21세기에 사는 한국 사람이 부른다는 이 낯설음이 벌어지는 이 현장은 튀르키예의 한 곳, 2000년이 넘는 시간의 공간을 구축하는 그리스인의 극장이었습니다. 거친 시간들이 떠오름에도 주변 언덕의 올리브 나무들이나 그것을 목숨삼아 살아내는 이곳의 사람들이 사는 주거 공간들에는 BC 3세기의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아니 신석기 그 시기부터 살아온 이들의 흔적들이 건물의 일부에서 또는 그들이 걷는 마을길에, 그리고 병풍삼은 페르가몬의 산에 알알이 박혀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살아내고, 호흡하며 오늘의 시간을 구축합니다. 마을 시장에서 산 달디단 포도에서 그들의 시간이 녹아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뱀꼬리.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 14-15)
버가모의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크고 견고한 교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1–2세기 당시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한 음식’은 단순히 고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시대적 특징이자 일상의 문화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니골라당과 영지주의적 생활방식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했으며, 이는 버가모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그레꼬–로마 문화적 배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가정교회의 지도자들—곧 예수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지도자들—이 그레꼬–로마 사회 속에서 교회를 형성해 가며 어떤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또 거부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니골라당을 비롯한 특정한 사상과 행위들에 대한 강력한 경계는 단지 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과 경계선을 세우는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요한의 입을 통해 전해진 예수님의 강한 비판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니골라당의 행위를 경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물음은 오늘날 교회가 어떤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 사회의 가치와 권력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시대마다 새롭게 직면하는 문화적 도전이자, 동시에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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