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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가나안, 여자, 그리고... M.?.G.A.

마태복음 15장, “두로와 시돈에서의 가나안 여자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장면이다. 이 말씀이 과연 예수 자신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일까, 아니면 당시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경계 의식 속에서 나온 말씀이었을까? 예수는 그녀를 시험하신 것일까? 아니면, 그 시대 유대 사회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인에 대한 문화적 습성을 따라 하신 말씀일까?

사도행전10장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공식적인 마지막사역이면서 동시에 이방인을 방문하고 세례를 준 사건이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도행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넬료를 찾아가기를 주저했던 베드로의 모습(행 10장),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예루살렘 공동체 내에서 벌어진 소동(행 11장)은, 초대교회가 이방인에 대한 이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그 장면을 서술하며 ‘할례자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의 수신자가 어떤 시각으로 그 사건을 받아들였는지를 암시해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사이에서도 이방인을 수용하는 문제는 명확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조차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특히 가나안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만약 마태복음의 이 이야기를,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집”이라는 경계선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신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중심은 자연스럽게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적극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반대로, 이 장면을 단지 예수의 ‘테스트’로만 받아들인다면, 결국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예정된 이방인 수용의 계획 안에 포함된 것으로 읽히게 된다. 전통적인 해석이 “예수의 신성”이라는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 해석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께서 당대 유대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경계 의식을 일정 부분 따르셨다는 전제를 생각한다면, 이 본문은 정해진 구도 안에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구도 자체를 흔들고 넘어서는 살아 있는 사건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그럴 경우, 가나안 여인은 단지 ‘믿음 좋은 이방 여성’이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미 짜여 있던 이야기의 질서를 뚫고 들어온 능동적인 존재로서, 그로 인해 예수의 사역이 경계 바깥으로 확장되는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이 된다. 마태의 시선 안에서도, 그녀는 주변부 인물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전환점에 선 인물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가 놓인 문맥도 주목할 만하다.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을 비판하시며, 유전과 규범에 얽매인 신앙을 문제 삼는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에 가나안 여인의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다. 이는 유대 종교 전통에 기대어 있었던 신앙과, 믿음만으로 응답을 받아내는 이방 여인의 태도가 강하게 대비되도록 의도된 구성일 수 있다. 그녀의 믿음은 단순히 ’칭찬받을 만한’ 차원을 넘어서, 마치 예수의 사역과 교회의 미래를 미리 당겨 보여주는 하나의 신학적 예고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이 본문은 단지 한 아이가 고침받는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방인과 마주하신 그 자리에서, 복음의 경계가 잠시 멈춰졌고, 그 멈춤 속에서 한 여인의 믿음이 그 경계를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전환의 장면이 된다. 마태는 이 사건을 복음서의 한복판, 장로들의 전통과 치유의 이야기 사이에 조용히 배치하면서, 그 의미를 독자가 천천히 발견하게 한다.

요즘 나는 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이야기와 제자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장면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예수의 전능성이 드러나는 순간들과, 그 전능성을 제자들이 인식해 가는 과정 사이에서 드러나는 작은 틈, 미묘한 지연, 의외의 전환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단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서술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고정된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전능성조차 어떤 때에는 타자의 믿음에 의해 반응하는 구조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 역시 단순한 기적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탑이나 상징물처럼 굳어진 신조들이 텍스트와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균열의 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신앙의 가능성이 열리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비참하고 잔인한 시대와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희망의 빛인지도... (썩을것들...)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25082612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