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요 기도회 설교 역시 비평적으로 듣고, AI와의 문답을 통해 나만의 '기도 이야기'를 찾아나섰다.
흔히 세대 담론이 가진 한계를 알면서도,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에 기대곤 한다. 그러나 범주의 경계를 선명하게 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범주 자체가 무너져버린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곤 한다. 청소년 사역자로서, 동시에 두 딸의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온 부모로서 고백하자면, 내 안의 우울감이 폭발했던 순간들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상흔으로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부모가 나와 같을 수 없으며, 동시에 저마다의 거친 이야기 속에서 겨우 부모가 되어간다. 그러니 '일반적인 부모'의 범주를 설정하고 특성화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문득 기독교 부모교육에서 논하던 부모들의 성향과 정황들을 되짚어본다. 그것은 인내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과 재정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나 허락되는 모델이었다.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의 특성에 맞추어 반응하고, 내 실수를 인식할 만큼의 분별력과 성숙함을 갖추려면 삶의 '여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의 사례로 순발력 있게 대처했다고 예시한 것들조차, 사실 내가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의 정황이 만들어낸 우연한 결과였을 뿐이었다. 이렇듯 구체적인 삶을 소거한 채 '일반론적인 부모'를 설정해 두고, 자녀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명제가 될 수 있다. 아이마다 필요한 지점이 다르고 부모가 처한 정황도 전혀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부모의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가닿아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공허하고 무책임한 명제적 주장에 그칠 뿐이다.
내 경우에 강의에서 다루는 핵심은, 부모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체득하며, 다시 아이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주체들이라는 점이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 목표점을 설정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에서 먼저 거쳐야 할 본분의 문제, 또는 보다 근본적인 도전들이 존재한다. 부모 또한 이를 치열하게 풀어가야 할 자녀와 '동등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을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이나 묵상 속에서 순간순간 체득된 단편적인 경험들의 나열로 한정하려는 경향성을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부모와 아이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삶의 맥락 속에서 '사랑과 책무의 양면성'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격려하는 것.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꽤 모호하고 지난한 길을 그저 묵묵히 읊어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