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기독교 지형(특히 미국과 한국)에서 '선교적(Missional)'이라는 용어는 전통적인 '복음주의(Evangelical)'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아마도 복음의 전포괄적인 능력을 지향한다는 점이나, 결과적으로 본질을 상실한채 트랜디한 용어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지독히도 닮아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오랫동안 "개인이 예수를 믿고 내세에 구원을 받는 것"과 "개교회 중심의 양적 확장으로서의 해외 선교"라는 영토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해 왔다. 거기에는 복음주의가 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의 깊이를 추구하지 못했고, 선교의 확장에서 비롯된 현대 세계의 국제적 다층성에 대한 도전 속에서 부상한 것이 '선교적'이라는 언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선교적' 담론의 출발은 (아마도 내 관찰에서 보면) 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통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종교적 울타리에 갇힌 신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열방 전체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며, 통치의 핵심은 '공의(미쉬파트)', 즉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회복시키는 은혜다. 선교적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교회의 담장을 넘어 성도의 일상과 사회 전 영역에 임하게 하는 '문화적 변혁'을 지향함으로써, 복음주의의 궤를 이어가고 있다.
2. 로잔의 유령: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책임'의 답습과 혼돈
그러나 이 담론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 선교 대회(IMC)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선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복음주의의 출발을 알리던 1974년 제1차 로잔대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던 "복음주의의 사회적 책임" 선언은 복음주의의 앞날을 예견하였다. 당시에 존 스토트와 빌리 그래함 진영 사이에서 치열하고 논의하면서 도출해낸 결론으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실천이 동전의 양면임을 천명했으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복음주의 진영은 이 긴장과 갈등 속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현재의 '선교적'이라는 단어 역시 이 해묵은 논란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교계에 더 큰 혼동을 야기하고 있다. '선교적 삶'이라는 수사가 성도의 일상이라는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정치·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성경적 공의와 공정을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해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과거 복음주의가 겪었던 진영 논리와 공공성의 부재라는 논란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으며, 도로 교회성장으로 매몰되고 있다.
3. 구조적 성장주의 비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국과 한국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 진영 내부의 현대 사회에서의 실천적 해답에서 드러난 분열의 조짐은 '선교적'이라는 단어로 대체됨에도 본질적인 구조 개혁이나 체질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세련된 레토릭이나 마케팅적 트렌드로 소비되는 데 그치고 있다. 결국 두 단어 모두 기존의 교회 성장주의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 '복음주의'가 양적 성장을 이룬 대형교회의 정당성이었다면, 오늘날 '선교적 교회' 역시 포스트모던 시대의 탈교회 현상을 방어하고, 정체된 교회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또 다른 목회 프로그램이나 생존 전략인 것처럼 의심된다. '선교적'이라는 이름의 카페 교회, 일터 선교, 소그룹 운동이 본질적인 공의의 실현보다는 개교회의 생존과 확장을 위한 세련된 대안으로 기획되는 현상으로 읽혀진다. 그나마 가정교회와 같이 소규모로 서로의 삶을 돌아보는 형태로의 구성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의의일 것이다.
4. 일상의 표준에서 일상의 고민으로
결론적으로 복음주의가 복음의 공적 영역을 담아내지 못한 한계 속에서, 사회의 문화적 변혁과 공공성을 포괄하는 '선교적'이라는 용어가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그나마 복음주의 내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 전환으로 기독교의 본질 회복이라던지, 삶의 개선과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비극은 '선교적'이라는 역동적인 언어조차 구약의 위대하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공의'와 '약자 보호'와 같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성장주의 논리 속에서 소비될 뿐이다. 복음주의든 선교적이든, '하나님 나라 통치'를 이루려는 교회의 모습이 이 사회의 대지 위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이상, 교회의 고립과 붕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는지 모른다. 애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모르고 있다는 점, 그분의 통치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예수를 믿었다는 고백만으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른다는 지점, 이 무지의 사실을 인정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정직한 것부터가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가 '바로 그' 교회인지 조차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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