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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 강좌 3강을 듣고.



오늘 3강은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운동의 분화 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1960년대 영미권 복음주의 진영의 분화가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점이었는데, 미국의 퓰러신학교에서 전적무오에 대한 입장차이 심화, 마틴루터킹 주니어의 죽음, 베트남전을 통과하면서 리차드 퀘베도는 전통적, 새로운, 젊은 복음주의로 나누어졌다고 보았고, 거기에 더하여 로버트 웨버의 차세대 복음주의(번역은 "젊은 복음주의"로 했으나 퀘베도는 young, 웨버는 younger)로 분화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전통적 복음주의는 빌리그레함, 새로운 복음주의는 존 스토트, 젊은 복음주의는 로날드 사이더 쯤의 대표주자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차세대 복음주의는 윌로크릭, 새들백, 그리고 이머징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있어 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이 등장한 배경에는 1980년대 광주민주화항쟁이 있었고, 손봉호, 이만열을 중심으로 한 사회참여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 있었던 로잔대회의 10개 조항을 재발견한 것이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나님 나라신학과 기독교세계관운동이 복음주의 안에서 사회실천을 실현하는 디딤돌로 작동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복음주의 사회참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측이 새로운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전통적 복음주의자였다는데 있습니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의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운동을 통한 레이건 행정부 탄생이었다는 점, 한국도 복음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뉴라이트 운동으로 뛰어든 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이야기 속에서 참여적 복음주의 운동의 동력이 90년대를 전후로 해서 상실한 원인을 한국의 선교운동과 연계해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88년 2차 로잔대회(마닐라)에서 미국측(보수복음주의계열)의 가시적 이탈은 이미 1차 로잔대회 이후 내재된 갈등의 현실화가 아니었나 싶고, 한국은 그런 미국의 흐름과 맞춰 흘러가면서 88년 선교한국의 등장과 기독학생 단체와 선교단체와의 연대를 가시화함으로 복음의 사회참여의 동력을 일찌감치 선교로 틀어버린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후로 AD2000운동과 미전도 종족 입양, GCOWE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회와 학생단체 모두 부진을 면치 못한채 3차 로잔대회에 돌아온 일련의 과정들을 본파면 사회참여에 대한 한국 교회(복음주의 전반)의 입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 운동의 주축이었던 학생단체들이 87년 이후의 사회적 상황을 초월하여 선교에 몰두했고, 한국 교회의 단기선교로 이어졌다는 측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로잔대회 언약의 5번째 조항에 대한 태도, 그러니까 지난 한국내 복음주의 입장을 나름대로 실천(?)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고조된 사회 참여의 분위기 속에서 교회는 눈을 해외로 돌렸고 참여적 복음주의 운동은 후속을 준비할 여력을 점차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제가 가진 생각입니다.
신복음주의가 나름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했지만 교회가 양식을 삼은 동력은 전도와 교회성장론에 입각한 선교적 지향점에 동의한 상태에서 부수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활동을 고려했다는 점은 아무래도 뼈아픈 과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복음주의라는 울타리를 깨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로잔언약의 사회적 활동이 의미하는 무게감을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 사회에서는(미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전히 가늠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선교가 복음전도라는 측면을 인식한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인지하면서도 실천적인 영역과 맞닿으면서 딜레마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지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과 사회 참여 사이의 거리감을 어디까지 둘 것인가, 정부와의 관계적 측면을 고려한 선교사의 활동들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영역에 있어서 한국 복음주의는 명확하게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교사 각자의 재량에 의존했다고 보는게 맞겠지요. 하지만 그 딜레마가 가시화된 시점은 2007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거기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이슬람 선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3강 이후 정리하면서 양희송 대표와 간단하게 나누었던 것도 이 부분인데, 복음 전도와 선교사들의 죽음이라는 이슈에 교회가 보여준 반응은 그동안 한국 복음주의가 지향했고 기대했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 선 한국 교회는 20세기 한국 복음주의가 말하는 전도와 선교가 의미했던 것을 지나치게 축소했거나 대책없는 낙관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복음주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랄프윈터 박사가 서구 선교의 12가지 실패를 거론하였고, 한국 선교지도자들 사이에서 고비용저효율의 서구 선교 모델 지양을 논의하던 시기가 바로 2007년이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내외의 랜드마크가 무너진 시기라며 양대표님께서 진단한 때도 2007년이었습니다. 2007년도의 이런 조짐들은 현재 한국 복음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코드들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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