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꼬맹이 둘을 데리고 전 재산을 훌훌 털어 1999년 12월 제2의 인생을 찾아 떠난 말라위. 현지인들의 느림(slow)의 미학에 반해 찾아간 아프리카 오지에서 그는 1년여 만에 낭만 대신 절망을 맛봐야 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인쇄소가 1년 만에 망해버린 것. 자동차 기름이 떨어져 20㎞를 걸어야 했고, 쌀 살 돈이 없어 빵 한 봉지로 온 가족이 1주일을 보냈다.
잘나가던 신문사 사진기자로 취재차 딱 한번 찾았던 말라위를 잊지 못해 11년 전 이민을 단행했던 백두현 씨(당시 36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막연한 꿈만 쫓은 결과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말라위에서는 이미 인도인 3ㆍ4세들이 대부분 상권을 쥐고 있었다.
결국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시내에서 8㎞ 떨어진 외곽 지역에 조그만 식당을 내기로 했다. 배구 클럽에서 사귄 아프리카 현지 친구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시멘트와 벽돌을 사서 직접 건물을 지었다.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이 벽돌을 날랐다.
마침 운도 따랐다. 지붕을 올릴 돈이 없어 고민하던 때 영국 선교회에서 파견해 갓 부임한 한국인 목사가 그를 도왔다. 돈이 없어 맥주 1박스, 음료수 1박스만 들여놓고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도넛 장사를 시작했다. 백씨의 인생역전은 이때부터다. 장사를 시작한 지 5분 만에 도넛과 음료수가 다 팔렸다. 며칠 장사하면서 `돈은 이렇게 버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취향에 맞춰 라이브 쇼를 해보자.` 우리나라로 치면 조용필 같은 현지 가수를 초빙했고, 현지신문에 광고도 냈다. 개업 첫날 예상의 10배가 넘는 1000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입장료와 스낵 치킨 판매로 꽤 짭짤한 돈벌이가 됐다. 말라위의 유명 장소가 되자 백인뿐만 아니라 현지 봉사를 온 일본인들까지 찾아왔다.
그는 또 한 번 사업 아이템을 발굴했다. 1인당 국민소득 300여 달러의 말라위에는 다른 나라 선교단체나 봉사단체 활동이 많다. 백씨는 선교사나 자원봉사자들이 묵을 비교적 저렴하고도 괜찮은 숙박시설을 짓기로 했다.
2003년 방 10개짜리 `Kim`s Koreana Lodge`가 문을 열었다. 말라위에 온 지 3년여 만이었다. 이후 콘퍼런스룸 등 편의시설을 확충해 현재는 방 50개에 직원 30명이 일하는 꽤 큰 시설을 자랑한다. 계속 사업을 확장 중인 그는 조만간 100실을 갖출 예정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성공신화를 쓴 백 사장은 20일 매일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이 가진 근면, 성실, 인내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며 겸손해 했다. 하지만 "저처럼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초기에 철저한 시장조사를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프리카 전체가 그렇듯 최근 말라위에도 중국인들이 몰려오고 있다. 백 사장은 "중국인이 4000명가량 들어와 값싼 생필품 위주 장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 사장은 "현재 말라위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전무하지만 사업거리는 많다"고 전했다. 말라위 호수와 함께 연중 27~28도를 오르내리는 고온 기후로 농업이 유망하다. 중고 자동차나 자전거 수리 기술자가 인기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컴퓨터 수리, 인터넷 연결사업도 유망하다. 또 우라늄 생산이 많고, 석유 매장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백 사장은 말라위 호수-탄자니아 세렝게티-짐바브웨 빅토리아폭포를 연결한 관광상품이 개발되면 많은 한국사람들이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크리스천이 된 백 사장은 "교육이 아프리카를 바꾼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여력이 생기면 불우한 현지 아이들을 위한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