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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오랜만에 본 영화 "Good Bye Lenin"

 영화를 선택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DVD를 모으는 재미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 어딘가에 딸려 들어왔던 스페셜 에디션. 그렇게 한구석에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의 흥미라면 동독의 시민입장에서 본 통일 독일이라는 점이었고, 무엇보다 '어머니를 위한 대대적인 작전'이라는 카피였다. 그리고 백만년이 지난 어제 아내와 함께 보았다.

  영화의 내용은 동독 사회주의에 열성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의 데모현장을 보며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코마상태로 8개월을 보내는 동안 동서독이 통일되어버렸다.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깨어나고 사회적 변화에 따른 쇼크를 우려해 동독이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음을 연극하게 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서독으로 망명한 아버지와의 만남, 어머니를 위해 동독의 체제를 선전하는 뉴스 만들기, 소련에서 견습생으로 온 간호사와의 사랑,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버거킹에서 일하는 누나와의 갈등 등을 요란하게 보여준다. 
  동독이 꿈꾸던 사회주의를 가상으로 만들어 본인과 어머니의 가슴속에 담아두는 노력은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 또 다른 노동자로 전락해버린 모습과 대비되기도 하지만, 결코 가족애만큼은 그 어떤 체제도 무너뜨리지 못함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이데올로기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신분때문에 차별을 받아 서독에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타고가는 택시 운전사가 그가 존경했던 동독의 최초 우주비행사였다는 사실과 망명한 아버지의 화려한 파티는 동독에서 의미있었던 가치가 한순간에 뒤바뀐 현실에 대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원했던 사회주의의 결과가 아니었다. 실상 어머니가 기대했던 이상의 결과는 헬리콥터로 실려가던 레닌상의 초라한 모습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것을 또 다른 동독의 꿈, 서독의 붕괴와 더불어 자발적인 도움을 만드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어머니에게 모순적이지만 해피엔딩의 현실을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한국의 통일과 그로 인한 상상이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한국과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북한의 만남은 물질주의의 승리로 끝날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로 인해 살아왔던 체제에 대한 한순간의 부인이 어떻게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선전만이 난무하고 값싼 노동력과 적자생존을 강요한다.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피력하고 약자된 자들에게 피해자의 삶을 강요하는 무례함은 영화 속에 틈틈히 보여준다.(벼룩시장의 군복, 버려진 가구들, 위성방송판매, 버거킹, 택시기사, 서독으로 가려는 병원의사 등)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동독의 변화에 무덤덤하게 원칙을 내세우던 은행 직원들의 관심은 기계적인 이미지로 폭군으로 드러나듯이 어쩔 수 없는 순응을 강요한다. 그런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어머니에게만큼은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으로 변환시키는 위트를 보여주었다.

 동독의 변화로 통일독일은 어떻게 달려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체제의 변환을 가져왔던 6년후의 모습은 생생히 기억한다. 동베를린은 여전히 더러웠고, 위험스러웠다. 뜯어고쳐야 하는 곳이었고,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반면에 서베를린은 그대로도 살만하다. 다른 형태로 노동자가 되어버린 동독사람들이 한동안 사회주의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를 별 의미없이 지나쳐왔다.
 겨우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곳에 서 있었던 나는 자유주의의 승리자인양 즐겼고, 체제를 비판했다. 그들의 심정도 모른채... 겨우 6년이 흐른 시간이었는데...

  한국의 통일은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른다. 최근 북한 정부의 공격적 태도나 남한 정부의 어설픈 대응을 보며 정치적 체제 유지의 방안으로 거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갈등 속에 갑작스런 통일을 마지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영화는 우리에게 조금이지만 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데오르기에 기댄 승리감도 아니었고 프로파간다를 통한 환상도 아니었다. 가.족.애. 
  이데오르기를 뛰어넘고, 아픔을 뛰어남었다.
  아무리 뛰어난 체제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영화는 어머니를 위해 만든 동독의 이상향이었지만 그것을 만든 아들은 오직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현실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 체제는 가족이 살아가는 수단이 될 뿐이다. 바라는 것은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힘도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한 가정의 평화를 만들 수 있으며, 마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바라기는 한국 사회가 물질주의적 가치를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사용되는 가정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 중심적 울타리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경쟁으로 뒤틀어진 사회와 가정 모두 치유할 유일한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위로와 격려의 장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어쩌면 한번도 해본적 없는 위로와 격려를 연습하는 공간으로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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