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du in Diversity

2007. 3. 29. TCF익산에서 나눈 말씀

쉼에 대한 묵상 (부제: 내게로 와서 배우라)

본문: 마태복음 11장 25-30

의역: 
그 대답하신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내가 감사한 것은 교양있고 현명한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시고, 무식하고 서투른 이에게 열어주신 것입니다.
아버지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니면 그 아들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 아들과 그 아들이 만약 계시해 주길 원하는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많은 일들에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이들은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들을 평안케 할 것이다.
너희 위에 내 멍에를 짊어지라. 그리고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께 순종적이고 겸손하기 때문에 (나에게 배우는 것이 맞다.)
그러면 너희들 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알맞고, 내 짐은 가볍다.

세상이나 성경 모두 평안, 안식 그리고 걱정없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기대하는 것들은 다르다. "동상이몽"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쉼의 모델이 되며, 쉼 그자체임을 말하신다. 이 말씀은 물리적인 평안과 안식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자신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도록 한다.

 본문에서 안식의 자리는 마음(개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 푸쉬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할 때 그 '령'이다. 하나님의 숨이 머무는 자리, 인간의 인간됨의 자리이다. 그 곳에 쉼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우리가 기대하는 안식이나 쉼의 자리는 아니셨다. 하얀거탑이나 봉달희에서 나오는 그런 응급실과도 같은 삶이셨다. 밀려드는 군중과 씨름하며 밤낮을 보내신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안식의 그림은 파란 바닷물이 밀려오는 바닷가에 야자수 그늘에 누워서 코코넛 쥬스를 마시며 있는 광고사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수가 초대하는 쉼은 멍에, 짐을 메는 자리이다. 여기서 그분이 제시한 그분의 멍에와 짐은 우리의 현실(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과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짊어진 짐그분의 짐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의 짐은 우리를 생령이라 불렀던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던 곳의 안식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숨이 거둬진 상태, 곧 죽은 혼의 상태인 것이다. 죽은 혼의 상태는 우리를 조종받는 상태의 노예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생령이 있는 상태는 '자유'의 상태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의 자리, 처음 창조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상태로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비록 우리의 육체와 삶이 분주하고 괴롭다 할지라도 그분의 영이 살아있는 상태가 안식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종은 신뢰를 동반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짐을 내려 놓으려면 그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데 그 확신은 그분을 믿는 믿음이며 신뢰다.
 
 예수님은 그것을 배우라라고 명령하신다. 그것은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숙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삶을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셨다. 그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된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자, 창조의 모습으로 사는 원래의 모습 그 자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든 만물들이 순종하여 그대로 나타난 것이 예배인 것처럼, 그분이 부르신 것에 반응하는 일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예배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종교적인 제의보다 순종이 더 낫다고 말한다. (1 Sam 15:22)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에 힘써야 한다.

 순종은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다. 부르심은 대답을 불러온다. 이 대답의 긍정의 반응이 순종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그분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그분의 부르심을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부르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규정하는 본질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그 본질이다. 두번째는 세상을 관리하는 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사는 일, 즉 직업이나 직분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사를 부르셨다. 기독교사는 단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를 패쓰하여 얻은 직업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교사를 할 수 있다. 그냥 교사가 아니라 그것도 '기독'교사다. 그분 앞에서는 '기독'의 의미가 없지만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본질을 말하면서 우리의 방향성을 말해주는 수식어다. 그 수식어가 붙은 교사, 기독교사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한다. 이미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여 기독인으로 교사의 자리를 감당하기로 결정했는데, 오늘 다시 한번 그 부르심을 재확인하려 한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는 삶은 불편하고 힘들다.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살고 싶은데 '기독'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자리는 우리를 안식함으로 이끄는 자리임을 기억하자.

 안식은 우리가 그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에 있다. 지친 일과에 기분 전환하는 쉼의 자리가 아니라 그 부르심의 치열한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님이 초대하는 안식의 자리다. 힘들까? 안심하자. 그분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것이 쉽고, 가볍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