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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융통성과 규칙 앞에서

이야기 1. 횡단보도와 신호등
작년부터 내 안에 잘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 있다. 교통 질서. 아무래도 아빠가 된다고 생각되니 내 아이에게 잔소리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호등 지키기'가 아이와 내가 이 사회에서 같이 지키게 될 규칙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닐지 몰라도 지각을 무릅쓰고 2-3분 빨간불 앞에 서 있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이 이제 몸에 조금 익숙해졌는지 초연함이 생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4거리에서 차도가 파란불이 켜지면 인도 역시 파란불이 켜진다. 문제는 우회전 차량이다. 인도에 붙은 차선은 우회전 또는 직진인데 우회전 차량이 멈춰서 있으면 뒷 차량은 클락숀을 울린다. 보행자들이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에 우회전 차량이 조금씩 끼어든다. 심한 경우 파란불이 켜지자 마자 우회전 하는 차량이 속력을 내어 횡단보도를 가로 지른다. 행단보도의 사람들 안전은 무시된다.

이야기 2. 한국 사회의 융통성과 규칙
회사를 다니면서 생긴 일이다. 전체 회사가 지키자고 만든 규칙이 있었다. 사원들의 복지 관련에 있어서다. 그것을 모르고 있던 나는 휴가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었다. 그러면서 기준을 살펴봤는데 그에 대한 적용이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면에서 우리 회사는 생각보다 복지에 있어서 너그럽지 않았다. 규정된 월차도 무시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사장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사장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규정이고, 여기는 우리에게 맞게 해야해." 우리의 업무에 있어선 타이트하게 조이면서 복지의 규정에 있어선 자신의 규정이 먼저였다. 때론 이런 규칙이 우리에게 유익된 면도 있지만 종종 불편함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 3. 공동체와 규칙
한국 사회에 있어서 규칙을 생각한 적이 종종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 사회 규칙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 규칙이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자주 본다. 규칙이란 사회가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가이드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편의에 맞춰 규칙을 지키곤 한다. 한국 사회의 영원한 숙제인 정치계와 경제계를 보면 더욱 극명하다. "유전 무죄"라는 말이 유행토록 한 삼성을 봐서도 그렇다. 삼성의 문제는 바로 사회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에 있다. 그런데도 삼성은 혜택을 본다.

삼성이 혜택을 보는 이유는 정말 돈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경제에 있어서 삼성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경제 구조에도 있다고 본다. 나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이렇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요점은 이것이다. 국가라고 하는 큰 틀 속에서 규칙보다 앞서는 것이 "우리(사회)"의 이익을 반영할 때이다. 그 구조에서 규칙을 드리미는 것은 "융통성"없는 태도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빨간불"에 건너선 안된다고 하면서도 한밤중에 아무런 차도 오고가지 않는 거리에서 "빨간불"에 건너지 않는 것을 융통성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교할 때 경중의 문제는 있지만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공동체로 구성된 사회일 수록 사회 규범은 그 가족의 연대와 관계가 깊다. 정직보다 "가문의 명예"가 우선시되고 덕이 되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규범이란 "가족의 이익(보호와 생존)"을 반영해야만 한다. 이것이 확대되면 마을의 이익으로, 그리고 국가의 이익으로 확대된다. (과거 국가란 "왕조"와 관련이 깊지만, 이런 이야기는 일단 패쑤) 규범의 기반이 "정직"과 "공의"보다 "안전", "보호", "이익"의 차원이 있을 때 융통성이란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인지 한국 신호체계를 보면서 자동차의 신호와 사람의 신호가 서로 충돌을 이루면서도 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것 같다. 혹 갈등 관계가 생기면 개인대 개인의 관계로 풀어간다. 인도의 파란불이 우회전하는 차량과 충돌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없이 지나가는 사회를 보면, 이런 기반이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규칙을 자신의 이익(보호)보다 낮게 보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야기 4. 정리하자. ㅠ.ㅠ
남아공에서 살면서 파란불에 좌회전하면(거긴 좌우가 바뀌어 있는 영국식이다.) 경찰에게 딱지를 떼는 경우를 몇번 보았다. 아무리 뒷차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라 생각한다는 말을 해도 그곳 경찰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딱지를 떠억하니 떼어주곤 가더라. '이런 융통성없는 경찰같으니라고...' 그렇게 생활했던 내가 한국의 신호체계에 의문을 던지는 상황이 된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다. 

성경에 참 많은 규칙이 등장한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교육은 성경의 규칙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규칙의 진정한 의미는 '관계'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규칙의 본질을 생각하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태도와도 관계가 깊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았다면 예수는 규칙의 '본질'이 담은 하나님의 본심에 있었다. 그러나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규칙을 지켰던 구약의 태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문제는 규칙을 적용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사랑'과 '긍휼' 그리고 '본질'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었다.

문화의 차이는 규칙을 이해하는 다른 틀을 제공한다. 특히 동양에서 이 문제는 크게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육과 제도의 틀이 서구의 가치관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규칙"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 질서다. 반면에 동양은 "관계"를 전제로 한 질서다. 이런 차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아노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나의 고민과 도전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나의 기준을 세우고 가르칠 것인가 이다. 

이 주제는 앞으로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삶에서 충돌되는 영역이며 한국 사회가 "규칙"중심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규칙이란 언제나 최소한의 가이드 라인이며 그것을 벗어난 융통성의 여지는 남아있다. 문제는 이 "융통성"이란 녀석을 어떤 기준으로 다룰 것인지이다. 나에게 있어서 "융통성"의 기준을 성경에서 찾으며 가고 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내 삶에서 충돌된 가치관에 대한 내가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 신호등 체계는 바뀌었으면 좋겠다. 꼭... 이 문제를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정부는 무책임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