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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자연과 함께 하는 교육

[장세진 육아일기] 유치원 수업 따로 있나 자연과 뛰어놀면 되지
 
어느 새 회사 앞 주차장에 벚꽃이 피었다. 지난 주말 공원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알을 발견했고, 우리는 산책로에서 슬쩍 빠져나와 나뭇잎을 밟으며 산길을 헤집고 다녔다.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약간의 용기와 호기심 가득한 눈만 있으면 세상은 참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연과 함께 느끼는 즐거움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가 아닐까.

문득, 일본 도쿄에 있는 자연주의 유치원에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100년 전통의 명문 유치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껏 기대를 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오래된 건물과 작은 운동장만 한 흙바닥이었다. 한쪽에는 유치원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나무 위에는 작은 오두막이 자리했다. 더운 날이라 선생님이 호스로 아이들에게 물을 뿌려주거나 플라스틱 통에 물을 담아 놓으면 아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장난을 치곤 했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소꿉장난하며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원장 선생님을 찾아가 물었다. "지금이 수업시간인가요, 쉬는 시간인가요?" 돌아온 대답은 꽤 충격적이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초등학교에 가면 배울 것을 미리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아이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우나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회성, 인성, 창의성과 호기심 등이 그것이지요.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힘은 유치원에서밖에 배울 수 없습니다."

도진미도리 유치원 세키모토 원장의 말은 값비싼 교구와 선행학습에 현혹된 우리나라 엄마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어디 있을까 찾아봤다. 선생님은 그중 한 아이를 안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아이가 나와서 둘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들 싸움은 다른 아이의 중재로 끝이 났다. 수돗가에서는 한 아이가 속옷을 빠는 모습이 보인다. 겉옷은 선생님들이 빨아주고 여벌 옷이 있지만, 속옷은 아이 스스로 빠는 듯했다. 팬티를 말려놓고 알몸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렇다. 자연스럽다는 것, 그것이 이 유치원에서 내내 느낀 이질감의 실체였다.

/ 조선일보
'맘&앙팡' 편집장

생각하기
아이들이 자연을 통해서 배우는 것과 공동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점차 개인주의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소중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생각한다. 분명 성경에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에 있어서도 '함께 함'의 소중함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위 기사에서 다룬 유치원의 모습은 분명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도전이 됨과 동시에 과거 동네에서 함께 뛰어 놀던 추억을 가진 이들에게는 향수가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빈약했던 시절, 동네 끝에서 끝까지 뛰어놀던 추억이 생각난다. 유치원도 없고, 특별한 교육도 없었지만 전통적인 규범을 자연스레 배우고, 자연의 신비도 배우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연주의가 지닌 한계는 인간이나 자연 그 자체가 스스로 선하다는 철학이 그 바탕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선하게 지음받은 사실이나 하나님이 각 사람마다 독특함을 주신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은 인간의 손으로 인해 타락하고 붕괴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자체가 죄로 오염된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오는 순진함과 자연 역시 타락된 존재임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으로 선한 인간상을 형성해 가려는 인본주의의 태도를 듬뿍담고 있다. 무엇보다 신이란 곧 '자연'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향수를 실천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적 이슈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땅을 밟고, 하늘을 보며 창조세계를 깊이 들이키며 공존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연주의 교육-네이버에서 서치

중세의 교육이 종교적·봉건적 권위나 특권에 따라 어린이의 욕구나 흥미 등을 극단적으로 억압한 데 대하여, 문예부흥을 계기로 중세의 초자연적인 권위나 특권에 입각한 교육을 극복하여 어린이에 내재하는 자연성()을 신뢰하고, 그것을 조장하며 개발하는 것이 교육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F.라블레는 《팡타그뤼엘:Pantagruel》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라는 규범을 들어 청소년의 흥미나 필요를 존중하였고, 그것을 살려 가며 학습시키는 새로운 교육을 구상하였다.

또 J.A.코메니우스는 교수의 방법을 자연계, 특히 동식물의 번식이나 성육()에서 볼 수 있는 법칙적인 현상, 즉 자연의 현상에 따라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루소는 저서 《에밀:Emile》의 첫머리에서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든 것이 선()하였는데 사람의 손에 넘어오자 모든 것이 악하게 되었다"고 하여, 어린이는 생래적()으로 착한 존재이므로 그들의 욕구를 살리면서 지성적인 방면으로 이끌고, 그들 자신이 자제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교육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어린이의 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성인과 같이 다루는 종전의 그릇된 교육을 비난하였으며, 어린이는 어린이로서 다룰 것을 강조하였다.

페스탈로치도 또한 자연에 따르는 교육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자연교육에서 ① 사람이 생래적으로 타고난 공통된 선성() 및 그 개발의 가능성, ② 타율에서 자율로 발달하며, 또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원리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자연의 진행에 따라 교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F.W.프뢰벨은 《인간교육:Die Menschenerziehung》에서 인간은, ① 자기의 내부 깊숙이 있는 정신적·신적()인 것을 자기의 밖으로 조형()하기 위하여, ② 이에 의해서 자기자신의 정신적·신적 본질과 신의 본질을 알기 위하여 창조하는 것이라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기계문명의 해독에 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풍조가 고조됨에 따라 교육계에는 도시의 문명적 환경을 피하여 교지()를 자연 속의 전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주지적()이며 기계적인 커리큘럼이나 획일적인 시간배당에 의한 기계적 운영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게 함으로써 기계문명과 도시생활에서 영향받는 해독을 피하고 자유롭고 건강한 인간을 육성하려는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신교육운동의 주요한 한 분야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적 교육풍조를 학교교육에 반영시킨 대표적인 사람은 J.E.드몰랭과 H.드몰랭이다.

이 사조는 20세기에 들어와 J.듀이와 E.L.손다이크 등에 영향을 주어 흥미중심·아동중심·활동중심의 교육을 주장하는 심리주의 교육설을 낳게 되었으며, 동시에 과학적 교육학의 전제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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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엔앙팡 2008.7 월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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