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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상대주의에 적응못한 한국 교회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어떤 현상이 앞선 시간에 벌어진 현상으로 인한 인과율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회학을 혼자서 공부한 탓에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사회학의 발전은 인과율을 통한 미래 예측을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다. 어쨌든 그런 사회학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과율에 미치는 요인들을 관찰하며 잘게 쪼개었고, 그 단위도 개인, 그리고 개인 내부의 다양한 관점들로 확장되면서, 인과율을 예측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했다.  개인과 집단이 가진 성향이 일관되었다는 전제는 어쩌면 인간의 나이브한 상상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집단의 강제성이 축소되고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된 세계가 확장되면서 뚜렷해진건 아닌지 싶다.

카노사의 굴욕 삽화. 12세기 출처. 나무위키

사회를 바라보는 일부(?) 교회의 시선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나님 왕국과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했고, 지리적 확장은 하나님 왕국의 확장이라는 제국의 관점과 일치했다. 그래서 신정일치의 고전적 정치체제를 고도화시켰다. 그동안 기독교는 사회질서의 정점에서 윤리와 질서의 주체가 되어 서구사회를 운영해왔고, 성서의 텍스트, 정확하게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신뢰할만한 주체들에 의하여 판단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거치고,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균열이 있었던 기독교적 세계, 바티칸 세계가 전복되었다. 개신교 세계관은 유대-가톨릭의 유산 속에서 성경에 대한 절대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역시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앞에서 분열과 영향력 감소로 이어졌다. 그리고 과학시대를 열었던 20세기 초, 세계 1,2차 대전의 발생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기독교 위상을 바닥으로 내친 결정타가 되었다.그나마 그런 흐름 아래에서 "기독교=제국주의"라는 비판을 기독교 내부에서 인정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할까? 기독교는 세계 질서/윤리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 자리는 곧 분열되었다.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사실상 종교적 다양성 아래에서 민족성과 지역성이 만들어낸 각각의 그림을 서로 부정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과학적 사고 역시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세계기독교의 토대가 흔들리던 시기에 민족주의 사관과 결합하여 등장했으나, 결국 종교적 몰입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주의 아래에서 변질되었으며, 해방후 미국의 정치 경제적 사고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 중심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리하고 있었고, 당시 국제 사회의 냉전체제 아래에서 양적 성장과 안정을 가져왔다. 즉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관점에서 한국의 현실을 읽었고, 세계를 대한 것이다. 비록 박정희 유신체제 아래서 미국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한국 기독교는 독재정권과 한 침대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 정도의 위치, 즉 서구 기독교가 잃어버린 사회내 윤리적 기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시대의 기독교 위상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라고 회고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사회는 유기적이고,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예측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문맹을 깨치고,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낙관적인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박살난지 오래다. 그럼에도 국가는 잘 교육 받는 것이 곧 국가의 건정성과 성장에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인지되고 있다. (물론 예산과 관련되면 달라지지만...) 교육을 잘 받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긍정적인 지표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혹 그 결과물이 좋다고 할지라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나눠지지 않는 것이 다반사이다. 제도적인 한계가 있건 없건, 개인들의 상황의 차이나 변화들로 인하여 그 격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즉 사회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고, 못할 뿐만 아니라 예측된 미래에 구성원들 모두를 담보하지 않는다. 

이렇게 길게 썰을 푼 것은 교회가 종종 사회 현상에 개입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사회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는 일반화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류의 배경에는 한국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신처럼 내려다보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교회가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시선을 갖게 된 건 그들이 탁월하거나 혈통적인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본래적 의미는 시민권에서 부여된 우월성이 아니라 메신저의 성격이 더 강하지 않았나? 문제는 그 메신저의 메세지가 내포하는 것, 즉 세상보다의 우월성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있다. 이에 대하여 교회가 일종의 성역화되고, 하나님 백성이 선민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 곳이 아닌데도, 특정 계층, 집단 등을 규정하고, 성질을 부여한다. 이런 상황 전개는 이미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내 의견이지만) 유대-기독교에서 이방-기독교로 전환된 과정을 정경화에 포함된 이유에는 하나님 나라 인식에 있어 선민과 성역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부정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 하다. 어쨌든 이런 우월적 사고에 상당수 교회들이 익숙한 듯 싶다.

사회 내에 벌어지는 일들은 보여진 것 너머의 다양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의 수준까지 확장하면 벌어진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어떤 사회의 흐름, 경향성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마저도 확신하기 어렵고, 결국 사건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 각자의 태도, 해석의 범위 아래에서 기록된다. 그래서 기록자는 자신의 가치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의도를 내포한채 서술한다. 그래서 각 개인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다양한 감정과 해석에서의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이후에 이런 사건을 재조명할 때 그 배경과 그 시기에서의 사회적 정황, 그리고 해석자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기억들이 도출된다. 

할로윈 축제가 근원적으로 한국 교회의 상당수에게는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할로윈이 자리했을 때는 그 배경과 상관없이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한 요인들을 간과한채 교회의 감정을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는 현장과 현재가 사라진, 의도성을 가진 시선의 산물일 것이다. 아마도 일부 교회는 이러한 배경들과 요인들을 배제한 채 '귀신'이라는 상징성에 매몰되어 판단하였을 것이다. 또는 종종 기독교 내부에서 세상을 대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대결구도로 보자면 기독교신이 세상신에게 진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판단되었을 때 필요한 태도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교회의 성결을 점검하여, 재를 뒤짚어 쓰고, 회개하며 성결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한국 교회의 일부 시선과는 상관없이 할로윈은 크리스마스처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국의 문화 일부가 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할 것이고, 개인들은 그것을 각자만의 이해 안에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것이고, 어떤 경향성, 또는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윤리적인 측면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측면일 수도 있으며, 교육적 측면이거나 사회적 측면, 아니면 여러 시선들이 결합된 측면에서의 이해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측면들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시점에서 정답에 가까운 결과가 있을지라도 다른 시간, 장소, 그리고 배경 속에서는 얼마든지 다르게 읽힐 있다. 이러한 시선을 상대주의라고 하는 같은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이 설정할 있는 좌표와 상대에게 읽혀지는 좌표도 다르고,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서도 다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절대좌표아래 있다고 선언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 또는 집단의 좌표일 뿐이다. 소통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만족 아래 있을 것인가팍팍 막히는 고구마같은 발언들 사이에서 에둘러 글이라도 써보니 조금 내려간 싶다.

참고로 한국교회가 문화를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교회 자체가 윤리적으로 판단할만큼의 거룩함이 존재하는가에 있으며, 그들의 판단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얻지 않는 채로 대결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미 대중문화를 파해치고, 화영식도 했었던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새삼 곱씹어 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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