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dge of Life/삶의 언저리

복잡한 사회 너머에 숨겨진 것들

[지랄발광같은 내머리] -경고- 짧진 않고, 의식의 흐름으로 쓴 글임.

솔직히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의 일정을 챙기면서도 이 껄끄러운 이 세계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탐욕 속에서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달려가고 있다. 어젯밤에 버틀러의 "젠더트러블"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것들은 진리의 부재, 현실 상황에서의 질서와 소수자들의 몸부림 등을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 속에서 재구성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내 영혼은 아득히 먼 저 곳으로 흘러가 있었다. 아마도 재구성이라는 의미는 어떤 목적과 균형이 존재하고, 현재의 불균형을 흔듦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간과했던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 놓는 것을 말하는 듯 싶다.

다문화를 공부하면서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 속에서 인간의 정서와 육체, 그리고 사회는 적응하기 위한 격렬한 몸부림과 부적응의 탄식과 비명들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학에서는 현상적으로 무슬림 난민의 급격한 증가일 것이고, 그 아래에는 경제적 불안, 그리고 그 밑에는 기존의 서구 사회 질서의 변화가 있어서라고 이해한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어처럼 하나의 트리거가 연속적으로 작동하여 모든 꼬리를 물어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할까?

윤석열 정권의 문제나 문재인, 박근혜,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권들 속에서 우리가 반응하는 것은 사실상 현상을 격발시킨 것일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수히 장치된 폭약들이 곳곳에 물려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처한 상황은 그동안 싼 똥들이 지뢰처럼 곳곳에 물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당정치가 만든 오늘날의 결과는 지지하는 무리들만을 위한 것 아닐까? 의원 개개인의 윤리나 신념 대신 선택한 결과들이 오늘의 양상인 셈이다. 교회라고 다를까? 한국 교회 현상황을 이해하려면 아마도 복음이 들어온 시기에 형성된 흐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속에서 신사참배가 단순히 배교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비호를 받는 종교체제의 탄생이라는 점도 숙고해봐야 한다. 해방 후 누가 미군정과 미국 기독교 교단의 지원을 받았는지 살펴보면 미군정 시기를 거쳐 이승만정부에 이르면서 개신교가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성장했는지도 살펴본다면 교회의 타락과 추락은 예정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기독교 성장과 한국 경제 성장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도 자본주의의 그늘아래서 '성장'을 위해 맘몬에게 제물로 드린 건 무엇이었을지 찾아보는 것도 오늘의 교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버틀러든 바우만이든 현대 사회가 처한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몇몇 사람들의 이론을 읊어대며 진단하는 것은 편협함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적어도 복잡함에 손놓고 내가 믿는 것만을 주장하는 행위보다는 건강하고 권장할만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기회를 통해 법만 공부하지 말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양한 이야기들에 귀를 좀 기울이면서 스스로의 시선을 키우면 좋을 듯 싶다. 내 입장에서는 몇몇 유튜버들과 알고리즘에 걸린 것만 보거나, 담목의 구호에 선동되지 말고... 혹 본인이 담목이라면 스스로의 신학과 세계관안에서 매몰되어 빤스목사처럼 되지 말고...

그나저나 버틀러 책을 어떻게 봐야할지 난감하긴 하다. 덕분에 예전에 만난 타릭 무두드 교수 책도 뒤척이는 계기가 되긴 했네. 세속화... 쯔읍...음?

메타 알고르즘은 내 복잡함을 이렇게 표현해 주는군... 미쿠짱...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