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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최초의 선교사 자녀학교 설립.

  1919년 선교사자녀 학교의 시작은 한국 선교의 시작과 함께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 파송에 있어서 자녀 교육문제가 그 전에 언급되었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충돌을 통해 세워졌고 22년에야 교사 파송을 통해 안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 선교가 이런 역사를 돌아보고 교훈 삼았다면 오늘날 선교가 어떤 모습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한국 선교에 있어서 MK이슈를 다루는 일이 많아진 것에 감사하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글들
조소임 교사 선교사 기사 1. 김교철 목사 "중화민국 산동(山東)선교사 홍승한(洪承漢) 목사(24)"  링크 사라짐(2022.1.12.) 
조소임 교사 언급, 박보경 한국 장로교회 초기 여성 선교사의  사역과 선교학적 의의(1908-1942)  링크 변경(2022.1.12.)

 

김교철 목사의 한국교회 해외선교행전(102) 
출처: 인천 기독교 신문 2010. 11. 26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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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자녀교육 및 최초의 선교사 자녀학교 설립(1919年1月)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하여 선교 초기부터 예산에 자녀금(子女金)을 책정하여 지불하였으나 자녀교육에 대한 특별한 방안은 없었다. 

1915년에 김영훈 선교사가 자녀들의 교육 방침이 발전되어야 함을 언급하였으나 역시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1917년에 선교사들이 교체되고 1919년 1월에 이르러서야 선교사 아동학교(宣敎師 兒童學校)를 설립하게 된다. 

최초의 선교사 자녀학교 교장은 1918년에 파송된 선교사 박상순 목사가 맡게 되었고 교원으로는 김윤식 의사의 부인 박희복 여사가 수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가을 총회 보고서에 김윤식 의사의 부인이 선교사의 아기를 자기 집에서 모으고 교수하였사오나 이후로는 교실과 교사가 없기 때문에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0년도 수입지출 예산표에 선교사 자녀가 12명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자녀교육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방효원 선교사는 난감한 일 4가지를 말하면서 그 가운데 한가지로 자녀교육 문제를 언급하였다. “자녀교육이 난감이오“ 

그러다가 1922년부터 선교사 아동학교(兒童學校) 교원으로 조소임, 리영애, 편순남 씨 등이 수고하게 되었고 선교사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조선(朝鮮)과 중국(中國), 일본(日本) 등지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동료 선교사들과의 연합 사역과 조선선교사회(朝鮮宣敎師會)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3년부터 동일 지역에 선교사 세 가정을 동시에 투입하여 연합하여 선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선교사들은 각자 선교비를 모금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또한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총회 전도국의 지시를 따라 동일한 목표를 갖고 어학공부와 전도사역에 충실하면서 선후배 관계이자 동료 선교사로 사역에 임한 것이다. 

방효원(方孝元) 선교사와 홍승한(洪承漢) 선교사 가정은 이미 언급한대로 처남매부 관계였고 1918년에 선교지에 도착한 박상순 선교사는 신학교 후배이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1916년 8월에 평북노회(平北老會)가 개최되었을 때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던 박상순 은 언권위원 허락을 받아 평북노회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1918년에 이르러 조선(朝鮮)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전도국 규칙과 조선선교회(朝鮮宣敎會) 규칙(規則)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1913년부터 1917년까지는 규칙도 없이 선교사역을 진행하다가 1918년에 이르러 규칙을 제정하고 선교사에게 규칙을 준수하도록 하였다. 

1918년에 제정된 규칙을 보면 무엇보다도 선교비의 일원화와 선교비 사용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조선(朝鮮)장로교회에서 보낸 추수감사연보와 특별헌금이 총회 전도국에 입금되고 책정된 예결산안이 총회의 결의를 거쳐 확정되면 책정된 선교비를 조선(朝鮮)선교회 회계에게 직송하도록 하였다. 

조선(朝鮮)선교사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로 조직하게 되어 1919년 10월부터 1920년 9월까지 첫 임기 신임원 선거를 하여 회장에 방효원 선교사, 회계 박상순, 서기 홍승한(洪承漢) 선교사를 선출되었다. 

조선선교사회(朝鮮宣敎師會)는 선교지의 선교사업과 재정문제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총회 전도국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까지 임기의 조선선교사회 신(新) 임원은 회장 겸 회계에 박상순 선교사, 서기(書記)는 홍승한 선교사가 맡게 되었다. 

1920년에 방효원 선교사는 첫 안식년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에 선교사회 임원을 맡지 아니하였다. 1921년 9월부터 1922년 8월까지는 방효원 선교사가 선교사회 회장과 회계 업무를 다 맡게 되었고 서기는 홍승한 선교사가 계속 맡게 되었다. 

조선(朝鮮)선교사회는 총회 파송 선교사로 조직하였으나 1921년에 의료 사역으로 공이 많은 김윤식 의사를 선교사회에 언권위원으로 참여케 하였다. 그리고 1922년 9월 1일부터 조선선교사회(朝鮮宣敎師會)는 선교지역이 확장되면서 총선교회와 두 개의 지선교회를 두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조직한 래양선교회(萊陽宣敎會) 회장(會長)에 방효원 선교사 ,서기 겸 회계로 박상순 선교사가 선출되었고 즉묵선교회(卽墨宣敎會)는 회장 겸 회계에 홍승한 선교사, 서기에 이대영 선교사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총선교회 임원으로 회장 박상순, 서기 이대영 선교사가 선출되었다. 조선선교사들의 선교지역이 넓어지면서 래양(萊陽, Lai Yang)에만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두 지역으로 나누어 거주하게 되면서 선교회 역시 두 개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인천 기독교 신문사 2010. 11. 26.http://www.ic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83김교철 목사의 한국교회 해외선교행전(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