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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시편 1편을 읽으며 "옮겨심은 나무" 아쎌.


아내를 무릎에 앉혔다.  뒤에서 이젠 태중의 조그만 미동에도 느낄만큼 풍성한 아내의 배를 뒤에서 안고 손을 얹었다. 그렇게 "아쎌"에게 이야기했다.(아쎌은 아이의 태명.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 의미는 "기쁨")
시편 1편. 쉬운 성경으로 읽어갔다. "행복한 사람"으로 시작한다.  가장 익숙한 구절에서 잠시 멈짓했다. "그는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옮겨 심은 나무... 그동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개혁개정)로 읊어 왔는데 그 "심은"이 쉬운 성경에서는 "옮겨 심은"으로 표현되었다. NIV에서는 "planted"를 사용한다.  곰곰히 생각한다. 그 나무는 심겨졌다. 다른 토양에서 시냇가 옆으로 옮겨심겨진 것이었다.  새로운 토양에 이식된 나무는 시내로 말미암아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항상 건강하게 나그네와 목동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그 나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나무는 시내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자라고, 시내도 그 나무 덕택에 방문자들을 맞이할 것이다. 
시내는 항상 흘러간다. 누구든 그를 필요로 하는 이는 시내로부터 얻게 된다.  누군가 장난을 쳐도 변함없는 맑은 얼굴로 인사할 뿐이다. 얻는 이가 없어도 맑은 물은 흘러간다. 그 물의 혜택을 옮겨온 나무는 얻는다. 그리고 나무는 또 다른 이들을 시냇가로 모이게 한다. 각양 각색의 동물 친구들과 목마른 이들, 쉼을 찾는 이들에게 "여기 달고 맛있는 물이 있어요."하고 선전한다.
아쎌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다. 하나님은 그 나무를 우리에게 주셨다. 아이는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그 아이에게 우리는 "시내"가 되어야 함을 주님은 암시해 주신다. 그렇다. 부모님은 나의 "시내"가 되어 주셨다. 한없이 베풀고 주셨다. 이젠 나에게 그 "시내"를 하라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 이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르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비"됨...
아쎌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다. 하나님은 아쎌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보여주신다.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다.  시편 1편의 시작으로 등장한 인물.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있기를 소망하는 아이.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이 "아쎌"인가 보다. 

그 아이는 잉태함 없는 5년의 마지막 자락에 허락해 주신 위로이자 기쁨이었다. 그렇게 기쁨을 우리에게 준 그 아이는 우리의 기쁨을 받을 차례인거 같다.
하나님은 자녀를 허락하심을 통해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이기에 기대도 되고,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 길이 시편 1편의 마지막 선언처럼 "의인"의 길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