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안다는 것이 2000년이 지난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처음엔 그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죽어서 얻는다는)이 나에게 가장 큰 이슈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 구원보다 현실에서 이뤄야할 공의와 선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과거에 기대던 구원은 나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초월을 꿈꿨던 흔적이며, 또 하나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도달하지 못하는 절대의에 대한 절망의 초월이었다. 그렇기에 계시록의 하나님 나라는 절대자의 선물이자 내 자아의 초월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먹을 수록 절대적 선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흔들림이 있다. 오히려 실현가능한 나라, 실천적인 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간다. 그렇다고 완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완성에 대한 기대가 높을수록 찾아오는 절망감이야 말로 좌절과 신앙에 대한 회의로 이끄니까. (아직까지는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두렵다.) 주님이 어떻게 재림하실지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을 사는 나에게는 그 나라의 도래와 실현이 나의 손에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선과 공의를 이루는데 필요한 용기가 죽음이후 얻게되는 안식을 기대야만 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이슬람의 지하드와 다를바 없는 공식같아서 불편하기도 하다.
최근 정치, 사회적 참여의 바람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나의 신앙이 어디까지 지지해 줄지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가 그것에 모두 뛰어들 자신도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적인 참여 속에서 내 시야속에서 벗어나버리는 '나의 의'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리고 참여의 용기 속에서 만나게 될 고난을 극복할 힘이 막연한 내세의 보상또 불편하기만 하다. 그 보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가 짊어진 십자가는 결코 보상이나 내세로 이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실제화(부활과 공동체)로 이뤄진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분명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지는 실제적인 삶의 도라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면서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절망의 길에서 그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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