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일방적인 흐름이다.
지금 내딛은 발이 있었던 바로 전의 땅도 내가 돌아서 다시 내딛는 순간 새로운 땅이 되어버린다.
지나가는 바람도 다르고, 내음도 다르고, 귀를 자극하는 소리들도 다르다. 모두 옛것이 되어버린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똑같은 바로 그곳이 찰나의 순간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길은 언제나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새로운 길을 내면서 우리네 조상들은 그 길에 인격을 부여하여 제를 올린다. 끊어진 길은 망자의 길이며 죽음을 상징한다. 더이상 내딛을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이어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딛으며 반복되는 풍경들을 스쳐가지만 분명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으며, 조금씩이지만 다른 순간을 스쳐가는 것이다.
그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 하나 하나가 스스로 의미를 가진채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나와 멀리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고, 그 하나 하나의 존재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며 오는 내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길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연속적으로 이어주는 유기체다.
그 어느 하나도 단속적이며 찰나의 스톱모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사진이 있다. 정지화면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속적인 하나일 뿐, 그 정지된 것이 그 순간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면 결국 우리네 기억에서도 희미해질 것이다. 동네 입구에 서 있는 정자 나무를 기억하는가?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이자 우리네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찍은 사진은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담겨져 있기에 의미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고 그 순간 담긴 사진역시 의미가 되고 역사가 된다. 사진은 바로 시간의 흐름의 한순간이면서도 과거를 담는 것이자, 오늘의 존재를 이어주는 끈이 되는 것이다.
그래, 그리움이다. 길은 현재의, 아니 흘러가는 나의 시간을 이어주는 끈이자 그 모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발자국을 담은 길은 더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흔적이다. 그러나 분명 그 발자국은 그 길에 있었고, 또 있다. 왜냐하면 내가 걸어왔으며 지금의 내가 있도록 지지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마치 하나 하나 쌓여진 거대한 돌탑과 같다. 허공에 떠있는 돌이 없듯이 내 시간에 딛은 발자국 하나는 사라질 수 없다. 그 발자국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지가나버린 물과 같이 역사의 하나로 쌓여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나만의 존재... 그래서 현실에서 사라진 내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뜻하게 바라보고 갈급하는 마음이다.
길을 걷는 것은 어디론가 가는 목적, 그 이상을 준다.
해지는 저넉즈음에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 둘씩 켜저가는 가로등을 본적이 있는가? 마치 집안에 켜지느 형광등처럼 반짝거리며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은 처음에는 어둡지만 점점 길을 비춰준다. 그리고 동네에도 하나 둘씩 불이켜지고 밥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올라온다. 그리고 그 연기들은 때로는 하늘로, 때로는 내가 지나는 길에 자욱히 뒤덮인다. 겨울의 끝자락이면 논두렁마다 밝은 노란색띄가 하얀 연기를 만들어가며 매케한 연기로 코를 자극한다. 물론 지금 가스레인지와 전기 등으로 꾸며진 신식부엌때문에 쉬이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푸른빛으로 점점 깊어지는 어둠에 동네 어귀에서 바라보는 집집마다 불빛들이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또 아침은 어떨까? 책가방을 매고 대문을 나오면 교과서 속의 풍경처럼 영희, 철수를 만난다. 재잘거리며 어제 본 만화영화 이야기며 숙제얘기며 가득가득 끝없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지나가는 길은 어제 저녁에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던 그 자리이며 나이먹기, 숨바꼭질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바로 그 곳이다. 하지만 아침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른 이야기 다른 것들로 채워진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길은 나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로 이어지는 성장의 흔적이었다. 새벽녘 어머니의 도시락을 들고서 버스정류장까지 뛰어가며 '축지법이 있었으면,' '공간이동이 있었으면'하고 잠깐의 잠시간을 아쉬워하며 원망하던 대상이 바로 어젯날의 내 놀이터였음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 군산에 온 것이 1996년이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오갈때 장항까지 오갔다. 그때는 서울역이 모든 열차의 출발역이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용산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니까 10년하고도 2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동안 언제나 그자리에 있었을꺼라 생각했던 변하지 않을꺼라 생각했던 것들은 아주 다르게 변했다. 천안부터 온양온천까지는 세상이 뒤바뀌었고, 이전에 텅비어 올라가던 장항선은 언제부턴가 만차가 되었다. 대학시절 대천까지 놀러가며 탔던 완행열차(비둘기호)는 먼 엣날에 사라졌다. 에전에 장터로 도시로 마실가던 아줌씨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등하교 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머물렀던 간이역들은 이제 이정표로 남아 과거의 흔적만을 남겨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 육중한 철덩어리 기차만이 달릴 수 있어서 변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기찻길이 보다 빠른 열차를 수용하기 위해 변하고 있다. 덕분에 군산-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고, 장항역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사라졌다. 또 과거에 식량 수탈의 종착지가 되었던 군산역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큰 변화는 나를 더 깊은 과거의 향수로 이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길, 그 존재가 있다.
지금 내딛은 발이 있었던 바로 전의 땅도 내가 돌아서 다시 내딛는 순간 새로운 땅이 되어버린다.
지나가는 바람도 다르고, 내음도 다르고, 귀를 자극하는 소리들도 다르다. 모두 옛것이 되어버린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똑같은 바로 그곳이 찰나의 순간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길은 언제나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새로운 길을 내면서 우리네 조상들은 그 길에 인격을 부여하여 제를 올린다. 끊어진 길은 망자의 길이며 죽음을 상징한다. 더이상 내딛을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이어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딛으며 반복되는 풍경들을 스쳐가지만 분명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으며, 조금씩이지만 다른 순간을 스쳐가는 것이다.
그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 하나 하나가 스스로 의미를 가진채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나와 멀리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고, 그 하나 하나의 존재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며 오는 내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길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연속적으로 이어주는 유기체다.
그 어느 하나도 단속적이며 찰나의 스톱모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사진이 있다. 정지화면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속적인 하나일 뿐, 그 정지된 것이 그 순간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면 결국 우리네 기억에서도 희미해질 것이다. 동네 입구에 서 있는 정자 나무를 기억하는가?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이자 우리네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찍은 사진은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담겨져 있기에 의미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고 그 순간 담긴 사진역시 의미가 되고 역사가 된다. 사진은 바로 시간의 흐름의 한순간이면서도 과거를 담는 것이자, 오늘의 존재를 이어주는 끈이 되는 것이다.
그래, 그리움이다. 길은 현재의, 아니 흘러가는 나의 시간을 이어주는 끈이자 그 모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발자국을 담은 길은 더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흔적이다. 그러나 분명 그 발자국은 그 길에 있었고, 또 있다. 왜냐하면 내가 걸어왔으며 지금의 내가 있도록 지지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마치 하나 하나 쌓여진 거대한 돌탑과 같다. 허공에 떠있는 돌이 없듯이 내 시간에 딛은 발자국 하나는 사라질 수 없다. 그 발자국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지가나버린 물과 같이 역사의 하나로 쌓여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나만의 존재... 그래서 현실에서 사라진 내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뜻하게 바라보고 갈급하는 마음이다.
길을 걷는 것은 어디론가 가는 목적, 그 이상을 준다.
해지는 저넉즈음에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 둘씩 켜저가는 가로등을 본적이 있는가? 마치 집안에 켜지느 형광등처럼 반짝거리며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은 처음에는 어둡지만 점점 길을 비춰준다. 그리고 동네에도 하나 둘씩 불이켜지고 밥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올라온다. 그리고 그 연기들은 때로는 하늘로, 때로는 내가 지나는 길에 자욱히 뒤덮인다. 겨울의 끝자락이면 논두렁마다 밝은 노란색띄가 하얀 연기를 만들어가며 매케한 연기로 코를 자극한다. 물론 지금 가스레인지와 전기 등으로 꾸며진 신식부엌때문에 쉬이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푸른빛으로 점점 깊어지는 어둠에 동네 어귀에서 바라보는 집집마다 불빛들이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또 아침은 어떨까? 책가방을 매고 대문을 나오면 교과서 속의 풍경처럼 영희, 철수를 만난다. 재잘거리며 어제 본 만화영화 이야기며 숙제얘기며 가득가득 끝없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지나가는 길은 어제 저녁에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던 그 자리이며 나이먹기, 숨바꼭질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바로 그 곳이다. 하지만 아침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른 이야기 다른 것들로 채워진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길은 나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로 이어지는 성장의 흔적이었다. 새벽녘 어머니의 도시락을 들고서 버스정류장까지 뛰어가며 '축지법이 있었으면,' '공간이동이 있었으면'하고 잠깐의 잠시간을 아쉬워하며 원망하던 대상이 바로 어젯날의 내 놀이터였음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 군산에 온 것이 1996년이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오갈때 장항까지 오갔다. 그때는 서울역이 모든 열차의 출발역이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용산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니까 10년하고도 2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동안 언제나 그자리에 있었을꺼라 생각했던 변하지 않을꺼라 생각했던 것들은 아주 다르게 변했다. 천안부터 온양온천까지는 세상이 뒤바뀌었고, 이전에 텅비어 올라가던 장항선은 언제부턴가 만차가 되었다. 대학시절 대천까지 놀러가며 탔던 완행열차(비둘기호)는 먼 엣날에 사라졌다. 에전에 장터로 도시로 마실가던 아줌씨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등하교 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머물렀던 간이역들은 이제 이정표로 남아 과거의 흔적만을 남겨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 육중한 철덩어리 기차만이 달릴 수 있어서 변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기찻길이 보다 빠른 열차를 수용하기 위해 변하고 있다. 덕분에 군산-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고, 장항역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사라졌다. 또 과거에 식량 수탈의 종착지가 되었던 군산역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큰 변화는 나를 더 깊은 과거의 향수로 이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길, 그 존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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