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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불편한 양쪽의 소리들을 묵상하며...

Where I stand....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요즘처럼 자신의 이야기와 성향을 이야기하는 적을 그리 본적이 없다. 지난 3년을 돌아보면서 요즘만큼 치열하게 상대에 대한 강한 비난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아마도 선거의 열기 때문이리라...
이 양분된 분위기에 내 페친(99%가 기독인이다.)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만 듣기 거북한 강성의 글들(양진영에서)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훑어보면 어쩔 수 없는 친미성향의 신학과 일제시대 이후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자주적 토착적 신학의 성향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이데올로기가 덮어져서 친일-반공-친미 성향의 전통적 기독교와 반일-반외세-친민족의 성향 기독교로 크게 두가지로 분할되어 오늘까지 왔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단순히 신학적인 이분법으로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노태우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연속성은 일종의 국가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각 성향이 좀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문민정부의 등장은 무너진 이데올로기로 덧칠함으로 한국 사회의 방어기재를 작동시켰고, 기독교에 있어서도 사회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문제는 사회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청년들의 반발은 이데올로기로 자기를 지켜왔던 세대에 대한 반동이자, 약자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담게 된다. 그러면서 유교적 전통을 깨뜨리며 기성세대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다. 이는 전통적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전통적 기독교(소위 보수 기독교)의 21세기 열매는 대형교회의 프렌차이즈와 지도자들의 타락, 재산문제, 교회내/교단의 싸움으로 얼룩진 것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수치를 감추며(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라며) 이런 지적을 공격으로 여기며 악의 세력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을 함으로 그동안 기득권을 지켜왔던 이들과 연대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

반대로 민족주의적 신학은 지난 40년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싸잡아 비난당하고 매장당하고 더 나아가 국가의 폭력에 노출되어 고난을 당했다. 이런 이들의 연대는 정치적 노선의 연합이라기 보다는 상한자들간의 연대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노선의 인물들은 이런 연대를 활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폭력의 방법으로 저항하도록 요구했고, 지난 세기의 국가간의 폭력들로 얼룩진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운동에 대한 아는바가 없어서 자세히 기술하기는 어렵지만 중남미의 정치적 상황과 민중신학의 대두는 앞에서 짧게 언급했던 민족주의적 신학이 걸어간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배경들을 통해서 본다면 분명히 사회의 전통적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정당할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 근본주의 신학을 고려한다면 진부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의 평가를 받는 건 나같은 보수적 기독교인에게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이자 서기관일테니까.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진보적 추종자들을 향해서도 일갈을 날린다. "내 나라는 여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지럽힌 질서를 바로잡고, 정죄하는 일이었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곧 오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다. 그것을 위해 예수를 추종하며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들이 바랬던 하나님 나라가 곧 오리라 믿으며 그 믿음의 정점이라 생각했던 예루살렘의 입성을 목도하며 흥분했던 그들은 곧 예수의 배신을 목도하며 의심한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땅에 발을 딛고 저주받은 사이에서 생산된 것들을 먹으며 살던 이들의 꿈꾸는 세상과는 다른 것을 확인하면서 절망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하루를 앞둔 이 나라를 보며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양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보여주시진 않을까?

이 상황에 있어보니 의외의 인물 가룟유다가 생각난다. 어쩌면 제자들 가운데 가장 의식있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고...
어쩌면 은화 30이라는 장치에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 치우져졌는지 모를 일이다.

이 밤을 생각하니 그에게 동정심이 생긴다. 이 시대를 살아내는 가룟유다들이 있다면 자신의 달려가는 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인내한다면 예수님의 진실을 보게 될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그게 나일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