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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초기 로마 교회(예수회)의 인도의 선교 정책

*GMTC과제를 하는 가운데 정리한 것. 이후 변동된 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코멘트를 달겠습니다.

목표.
두 선교사를 분석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선교 방향성 분석
예수회 동아시아 선교정책을 분석하고 의의를 찾음
비판과 평가

1. 초기 로마 교회의 인도의 선교 정책
1) 유럽 교회 이식
  • 초기 탁발 수도사들의 사역 방식. 포르투칼과 현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라틴교회
  • 공권력에 의한 강제적 개종, 정치적 개종의 가능성이 현저히 높음
  • 일괄적이며 통일적인 선교지 교회 관리가 가능 (현지 상황의 고려 없이)
  • 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
 2) 선교 토착화
  • 하비에르의 등장으로 토착화 신학이 등장, 마테오 리치의 사역으로 정교화 되고, 드노빌리가 활용
  • 지배계층의 개종을 위해 종교적 논쟁과 현지 종교의 초월성에 기독교 교리를 연결하려는 시도
  • 현지 사역자 발굴의 필요성
  • 기준선이 모호해 개인의 경험과 이해에 따른 주관성이 기독교 핵심 교리를 흔드는 위험이 있음
  • 실제 선교 현장에서 이에 대한 열매가 매우 적었음
  • 오늘날 선교 상황화 대두로 하비에르의 선교 정책이 재부상
 3) 평가
  • 로마 교회의 선교 인식 변화는 선교 현장에서 부딪힌 결과로 나타났다.
  • 하비에르의 탁월한 선교적 시선은 예수회 선교의 전체 방향성으로 나타났다.
  • 인도 선교는 동아시아 선교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고, 선교 신학의 모태가 되었다.
  • 선교 이식과 선교 토착화 사이의 대화보다는 논쟁과 설전이 오고갔는데, 내부적으로는 로마 교회 내부의 지역 갈등이 선교 신학적 갈등보다 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성경과 교리를 번역하는데 있어 현지 종교 문화적 상황을 깊이 검토하는 지혜를 남겼다.

2. 인도 선교의 핵심 인물 분석
Francis Xavier(1506-1552)
 의의
  • 예수회 최초의 선교사
  • 동서문명의 교류를 이끈 최초의 선교사
  • 동아시아 선교의 나침반 역할
  • 아시아 지역의 이방인에 대한 재평가와 선교 방식 전환의 선구자
 1) 현지 사역자 개발
   - 인도의 집단 개종으로 인한 부족한 성직자 수요에 대해 타개책이 필요
   - 1542년 로마 교회에 보고. 성도마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들을 훈련시키는 의견 제시
  • 디오고 디 보르바가 세운 “거룩한 신앙의 우애회” 세례자 예비학교 모델을 현지인 선교사 훈련 학교라는 큰 틀로 바꿈. 이후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되는 성바울 신학교로 성장함
 2) 타종교 이해
  • 힌두교에서 신적 초월성을 발견하여 기독교 교리와 접촉을 시도
  • 카나라 산야시를 만나며 브라만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바뀌는 경험을 함
  • 일본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을 오역하는 실수를 통해 일본 종교와 깊은 대화를 나눔
  • “유럽 기독교 이식”이라는 선교방법에 대한 전환을 가져옴

 3) 동아시아 지역의 사회 상황 이해
  • 아시아 지역의 소위 지배계급의 변화로 인한 피지배계급의 집단 개종을 경험하면서 나온 발상
  • 일본 선교를 통해 유교적 사상을 접하며 동아시아 선교정책이 기존 정책과 다를 필요가 있음을 발견
  • 중국 선교의 기초가 됨
Roberto de Nobili(1577-1656)
의의.

 - 선교현장의 사회제도와 기독교 복음이 어떤 식으롣 대화할 수 있는지의 모델 제시

 1) 드노빌리의 선교 토착화
   - 드노빌리의 파랑기 거부
     *파랑기 선교정책
     “파랑기” 유럽선교사나 포르투칼 상인들을 총칭.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소고기를 먹고, 잘 씾지 않아 냄새가 나는 불가촉천민
   - 브라만 카스트들의 거주지역으로 이동
   - 첫 열매 1608년 Sivadharma의 개종
   - 1610년 “기독교신앙선언Minifesto”를 발표. 스스로 Brahmin Sanyasi임을 선포 (파랑기거부)
    - 1613년 페코 프란체스코의 부장적 입장이 인도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식. “인도의 종교와 풍습에 관한 정보informatio” 저술
    - 1623년 드노빌리의 선교신학이 인정받았음에도 1628년 이후 결과는 파리아들의 집단 개종
   - 드노빌리 말년에는 질병과 투옥의 시기.
   - 페르난데스와의 갈등
    • 마두라이 미션 운영자. 파리바 기독교인들과 일부 포르투칼 무역상을 위한 목회자
    • 드노빌리가 마두라이에 도착후 소속
    • 갈등. 1) 포르투칼 vs. 이탈리아. 2) 토착문화를 반대
 2) 안토니 비코(드노빌리 지지 노선)의 6개 선교원칙-John Correia-Afonso는 드노빌리 작품이라 주장.
       1. 선교사는 자신이 파랑기가 아님을 선포
       2.
선교사는 진리를 향한 구도자인 사냐시로 행동
       3.
포르투칼의 생활방식 포기, 브라만 카스트와 함께 생활해야 한다.
       4. 
파라바 기독교인의 저급한 기독교 용어를 브라만 식으로 바꾸어 사용
       5. 
파라바 기독교인의 예배 형식을 보완하고 브라만식으로 바꾸어야
       6.
파랑기들과 파라바 기독교인들의 거주지를 벗어나 브라만 카스트 거주지에 교회와 거주지 마련
 
        평가.
          i. 
프란시스 하비에르의 일본 선교,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 영향
          ii. 
현대에 있어서도 어려운 숙제. 브라만은 기독교에 배타적, 천민 계급 달리트는 드노빌리 식의 차별 정책에 대한
             반발
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는 기독교 본질을 희석시킨다 비판
 3) 신학적 갈등 전개
    (1) 
1610년 드노빌리의 기독교 신앙선언이후 말라바지역의 선교순찰사(니콜라스 피멘타)는 페르난데스의 고발문
          서 접수로
선교신학과 방법론 견제
     i. 
긴급 선교사회의 소집(1610. 코친) 12명의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모임-드노빌리의 선교방법이 적절하다는 쪽
       으로
기울어짐
     ii. 
9월. 고아의 신학자들과 관리들의 문제제기로 다시 심사
     iii. 순철사는 알베르토 라에르지오에게 다시 심사할 것을 요청.
     iv. 라에르지오는 페르난데스, 앤드루 부체리오 선교사에게 개종자들을 직접 구두 심사 요청
     v. 1610년 10월 3일 예수회 총장(클라우데 아콰비바)에게 상이한 보고서 전달
     vi. 결과. 드노빌리는 “기독교 신앙 변증Apologia”를 저술. 비코의 6개 선교원칙 선언
     vii. 크랭카노르 대주교(프랜시스 로스)도 드노빌리를 지지
   (2) 
1611년 12월 고아 대주교(크리스토빙 드 사)의 임명으로 드노빌리 선교신학이 재도전
   (3) 말라바의 지역 주교(페로 프란치스코, 피멘타에게 임명) 마두라이 방문, 드노빌리와 로스 면담. 이들의 선교정책
         비판
보고서를 예수회 총장에게 제출
   (4) 1612년 예수회 총장과 추기경(로베르토 벨라르미네)의 공식서한에 대해 각가 상이하게 해석
   (5) 1613. 11월. 페로 프란체스코가 1612년 공식서한의 원래의도를 밝혀달라고 공식서한 발송
   (6) 드노벨리의 반대자들이 사망(1614년 피멘타, 1615년 예수회 총장, 말라바 지역주교, 1617년 앤드루 부체리오,
         곤살로 페르
난데스) 그리고 드노빌리에 대한 적대적 입장이 완화됨
   (7) 1619년 고아 종교회의에서 여전히 드노빌리의 선교신학과 방법론에 대한 공방이 전개, 외부적으로는 예수회  본
         부와 교황
청에 각자의 지지를 호소하는 서한 발송
   (8) 1623년 인도에 도착한 교황 그레고리 15세의 칙서에 드노빌리의 선교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
  
3. 
초기 인도 선교 평가
 1) 긍정적인 부분
   (1) 선교 토착화 시도
   (2) 타종교 내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도됨
   (3) 현지인들의 상황을 배려하려는 태도
 2) 생각할 부분
   (1)  타블라라사를 생각할 때 당시의 신학이 가진 크리스텐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선교현장에서 상황화를 고려했
          다면
로마교회가 크리스텐덤을 넘어서는데 무엇이 걸림돌이 되었을까? 개신교는 이런 것을 왜 못 배웠을까?
   (2)  드노빌리와 페르난데스 사이의 갈등 원인을 드노빌리식의 현지화(카스트제도의 수용)로 본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우려로 비판했다면 충분히 논의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하비에르같이 예수회 내의 영향력이 큰 사람의 경우 신학
          자체보다 인물적 평가로 흘러가기 쉬워 객관적 판단이 어렵고, 예수회 내부에서 있었을 신학적 치열함에 대한 조
          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회 선교정책을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았다. 

   (3) 드노빌리식 상황화(가톨릭에서는 즉응주의)는 이후 폐기되지만 한 사회의 문화와 종교적 요소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으며, 선교사가 내린 현지 문화의 평가를 일관성있게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경험하고 평가한 근거를 살펴보고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하고 최종적인 평가는 현지인이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판단한다. 
   (4) 예수회의 포르투칼의 동아시아 식민주의 정책에 조력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의 여지가 있다. 이는 식민지 정책의 도
         덕성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 포르투칼의 지배 가치가 충돌할 때 결국 신학 논리보다 교황과 황제간의 힘
         의 대결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5) 신학적인 한계성을 극복하는데 타문화 접촉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지만 로마 교회의 내부적 노력은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한계에 갖혀야만 했다.
   (6) 신학적 가치보다 지역주의적인 배경이 우선시되는 분위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진리를 방해하는 장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