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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한 선교사 평가에 대한 단상

어제, 그러니까 2019. 7. 19. 낮에 요도 어딘가에 걸린 돌을 묵상(?)하다가 최근 어떤 일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 연결되어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읽어가니 몇가지 문법적으로 수정할 부분이 있겠지만 그당시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수정없이 올려본다.

 

선교지에서의 갈등과 선교사 평가는 항상 한쪽의 이야기에서 판가름낼 수 없다. 특별히 사건과 관련된 경우, 누적된 정황들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건이라는 것이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논의가 다르고, 앞서 있었던 상관관계가 있는 사건들 가운데 무엇과 인과관계로 묶을 것이냐에 따라서도 다르다는 점에서 특정 편의 이야기들은 주로 그런 인과관계의 연속성에 따라 갈라진다. 또 하나는 누구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성폭행/성추행을 보면 가해자입장과 피해자입장에서 갈려 치열한 논쟁을 하는 경우들을 본다. 사건 관련자가 선교지도자거나 중책을 맡은 일종의 권력의 차이에서도 달라진다. 여기엔 미디어에 노출된 정도로 형성된 신뢰의 권력도 포함한다. 또 현지인과의 갈등이 발생할때 오는 자국민 중심의 관점도 있다. 이렇듯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는 종종 중립성을 위협하거나 어그러뜨리게 된다. 

Photo by  Nick Jio  on  Unsplash

과거 소위 네트워크라는 일을 하면서 중립성을 지키려 애쓴 적이 있다. 그 경험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앞서 언급한 사건들의 시선들이 엉켜있는데, 나 역시 그 하나의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평가의 중심에는 소위 객관적인 어른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일 돌아보면 그 역시 좋은 선택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어른들도 어떤 입장에 기반하고 있었고, 두번째는 내가 그 평가를 실행했지만 신뢰할 수 없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자신이 바라보는 입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하나님은 악인의 행위를 들어낼 것이라 말하곤 한다. 그러나 종교계에서 하나님을 내편으로 삼아 이야기하는 행위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소위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 때로는 하나님이 '악을 드러내신다'라고 하면서 감춰진 죄는 언젠가 드러내고 만다는 식의 설명도 수용할 수 없다. 역서적으로 돌아보더라도 기껏해야 그들의 공적이 거론될때마다 따라다니는 꼬리표정도로 남는다. 

내 생명이 짧고 하나님의 시간은 길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정리하는 것은 꺼림직하고, 마침표를 찍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시대를 살면서 어떤 갈등의 주체들이 살아가는 삶들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신가?'라는 질문을 지울 수 없다. 분명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라지만 그 '용서'가 영화 밀양에서 우리에게 던진 그 '의문의 용서'처럼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게 가볍게 처리되는 현실을 직면할 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 내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 네트워크에서 물러나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 나에게 여전히 정치적이지 못한 내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덜 고민하게 되지만, 덕분에 다시 그 전선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도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받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역할은 거기까지'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으로 관심을 끊는게 맞는지 싶다가도 내가 무슨 능력과 권위가 있다고 그걸 평가하려 하는지 싶다. 내 몸에 빠지지 않고 걸린 돌마냥 내 심정에 그렇게 돌 하나 큰 것이 걸려 있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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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이유가 있고,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판단에 대한 올바름의 문제는 아마도 개인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신뢰감보다는 좀 더 공공의 문제로 갈 수 밖에 없기에 칼을 갈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기독교 사칭자들이 주류에 포진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하지 못한 건 아닌 걸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너무나 관계에 얽매여 공공의 올바름보다 관계의 사사로운 올바름에 열심인 결과로 이 치욕의 시간들을 겪어내는 듯 싶다. 타인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이들이 강단에서 공의와 거룩을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로 사기치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악의 무게를 가졌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그것을 파고들어가는 몫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이 그분이 만든 세상, 함께 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