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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집을 짓는다는 것. (지인 선교사님의 글에 답하며)

건축가 최욱 & 서양화가 지니서의 부암동집


선교사님이 올려주신 동영상과 글은 집짓고 있는 저에게 여러 생각을 주게 하는군요.

"자신들이 마음에 두는 것, 좋아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가면 중년 때 그 열매들을 거둔다."

집짓기를 하면서 나름의 철학을 펼쳐보이고 싶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명확한 가치관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재화가 필요하더라구요. 거기에 더해 집을 짓기 위해 가족들의 도움을 받다보니 그분들의 시선들을 만족시켜야하는 부담감은 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주택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데요. 여차여차해서 그걸 소유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특권이 된다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그래서일가요? 소유의 만족과 이를 바라보는 부러운 시선이 부담스러운데요. 아마도 이 시대를 살면서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은 일종에 사회적으로 빚을 지고 사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더하여 가족들을 포함하여, 건축의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것들 모두가 저의 의존성을 드러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독립하였다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감정들은 일종의 빚처럼 마음에 켜켜이 쌓여갑니다.

건축을 하면서 집이 올라가는 그 하나하나의 과정과 결과물은 건축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여러 주변들의 시선들이 교차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뒷 집과 얽힌 땅 문제는 건축 대지의 이동과 시공시 어려움으로 나타나고 그 어려움들은 건축물에 튀어져 나옴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족들의 경제적 지원들이 있었다는 점은 나름 외관에 대한 번듯함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모든 건 가진 그 한계에서 입니다. 막상 이사하면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다이나믹한 삶을 살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건축의 과정, 완성되는 과정에는 이런 감정들을 설계로, 시공으로, 변경으로 외부마감재로, 내장마감재에 담겨진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도 그렇겠지요? 내 삶의 지금 형상은 내가 살아온 과거의 인과관계의 결과지만, 내가 기획한 의도와 상관없는 벌어진 상황에 대한 즉흥적인 것이기도 하겠지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돌발적인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후회를 하면, 다음에 개선을 하는 에너지로 바뀌었으면 하는데, 사람관계는 그렇게 논리적이지 못한거 같네요. 다만 지어진 집은 나에게 그 하나 하나의 인과적 결과물로만 답하는 거 같습니다.

의도, 가치관... 나는 누구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