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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개신교 첫 순교의 피흘린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출처= 데날리클럽 http://www.denaliclub.com/detail.php?number=563

사족>>>

북한에 평양과학기술대학교를 짓는 과정에서 다시한번 토마스 선교사가 조명되는 일이 있었다. 현재 평양과기대 장소가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 터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다시 그의 일생이 조명받게 된 것이다. 평양과기대와 토마스 선교사가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의미를 부여하자면 평양 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면서 한국 기독교가 운동으로 세워가는 평양과기대가 앞으로 통일운동과 한국 기독교의 각성운동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 기억되어야 할 것은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의 어떤 헌신이나 순종의 몸짓 하나도 의미없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으며 적어도 토마스 선교사의 재 조명 속에서 한국 기독인들 일부의 각성과 소망을 꿈꾸며 통일한국을 위해 준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도 토마스 선교사의 열매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아온 나는 내 인생이 그의 삶만큼이나 가치가 있고 영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냥... 해본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