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는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엘라 아펜젤러 부부 사이에서 1885년 11월 9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엘라 아펜젤러의 태중에서 태평양을 건넜고, 그해 가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후 국내에서 유치원을 마치고 어렸을때 통신교육을 받다가, 11세에 중국 산동성에 위치한 치푸 스쿨(CIM소속 외국인 학교)에서 5년간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헨리 아펜젤러가 사고로 사망하고, 그녀는 미국으로 이동하여 고등교육을 마쳤다. 1915년에 감리교 선교사로 돌아온 엘리스는 이화어학당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고, 1922년에 6대 어학당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25년 4월에 이화어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켰고, 미일관계의 악화로 1940년에 강제귀국될 때까지 현재 신촌 자리를 마련하여 이화여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녀는 김활란 여사에게 교장자리를 1939년에 인계하였지만, 이후에도 신앙과 조선에 대한 열정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해방후, 그녀는 1946년에 내한하였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전 1950년 2월 뇌출혈로 쓰러져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녀는 미국인이었지만 한국인의 심성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마치고 한국의 땅에 안장되었다.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냄으로 인해, TCK가 겪는 정체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겪지는 않았겠지만, 그녀는 한국에서 처음 태어난 선교사자녀로 선교사와 조선인들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는 통로가 되었고, 어린시절을 정동에서 보내는 동안 주변의 조선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곧잘 조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태어난 고향으로써, 동시에 부모님이 사랑하는 조선에 대한 마음은 남달랐으며, 당시 조선이 겪었던 여성의 삶, 식민지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아버지 헨리 아펜젤러의 사역을 이어, 조선 여성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엘리스의 삶과 헌신은 우리 민족에게 큰 힘이 되었고, 한국 여성들에게 꿈을 제공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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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보기 아펜젤러 설립 인천 내리교회 120돌 동아일보기사>
국민일보 할아버지가 뿌린 믿음 120년 (삭제됨)
국민일보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엘리스 아펜젤러의 묘비글 (삭제됨)
엘리스 아펜젤러 소개
산둥성 치푸 스쿨 소개 (CIM, China Inland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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