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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믿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기독인으로 살면서 만나는 가장 큰 도전은 내가 "믿고" 있는 것과 믿도 있는 "것" 사이의 충돌이었다.
  사실 믿음이란 사실과 행함으로 확증되는 것이기에 앞에서 말한 "믿고"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은 아니다. 그러나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나는 믿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행함이 있든 없든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의미에서 말하려 한다. 

  한국 교육에 있어서 대학 입시는 예전부터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는 요소였고, 결과적으로 볼 때 한국 기독교의 세속화를 가속시켰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포인트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급속도로 팽창된 시장은 교육영역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대학입학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대학 입학이 의미하는 바, 학연과 지연을 통한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 사회만의 이슈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신분상승의 유일한 방법이 공부외에는 없었기 때문이고 자원의 부족은 이를 부추겼다. 이런 신분 상승에 기독교는 크게 한몫했다. 농촌 계몽을 비롯하여 문맹퇴치운동, 기독교와 더불어 들어온 서구 학문 기회 제공은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의 이데오르기 갈등이나 경제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사회 성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를 푸는데 소홀히 했고, 그 결과로 칼빈주의의 소유에 대한 청지기적 가르침은 개인의 부를 획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만을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반면 교회 내부에서 헌금과 십일조, 구제 등을 통해 그들의 도덕적 윤리적인 부담을 더는 가르침이 강화되었다. 기독교 교육은 이를 근거로 개인의 윤리적인 부분만은 만지는 요소가 되었고 성공주의 신화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이로 인해 교육의 본질보다 교육이 수단화되는 결과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명확해 진다. 대학입학을 앞둔 고3 부모에게 있어서 교회 생활은 그들의 신앙적 가치에 대한 것을 잘 보여주듯이 나에게도 고3은 참 괴로운 시절이었다. 부모의 압력은 크지 않았지만 주일 성수에 대한 나의 믿음은 타협으로 전락되었다. 주일성수는 나의 사회적 성공과 비교할 때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믿음이 변하지 않을꺼라는 가르침은 실용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예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지"만 정말 믿는 "것"이 예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한국 교회의 현상은 한국 교회 스스로 만든 자승자박이다. 이 결과는 단순히 교육에만 나타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가르침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같은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는 것에 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가" 내 이웃인가?보다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누가" 나를 성공하도록 돕는 이웃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 비록 가르침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한국의 오늘날까지 이르는 시대 정신이 "나"의 성공을 "나" "우리"만의 이야기로 축소시키거나 변질시키고 있음을 의미하며 한국 교회는 그런 시대정신에 따라가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본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된 오늘에 있어서 더 강화된 느낌이다. IMF가 터지고 미래에 대한 경제적인 보장이 무너졌고 그동안 막연했던 장미빛 미래가 불확실한 혼돈의 구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한국 교회는 시대정신에 대한 경고를 하기 시작했지만 실상 이미 변질된 자신의 체질의 관성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반동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교회가 축소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외견상 나타난 윤리적 도덕적 문제보다 내면적으로 교회가 세속화에 충실히 따라갔고, 현 시대와 비추어볼때 별반 다를 것이 없음에도 입만 열면 도덕 성인 군자의 이야기나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교회의 별질은 이미 80년대 성공 신학에서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가난하고 낮은 도움이 필요한 자의 이웃이 아니다. 어느새 그동안 성취해왔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벗어버리지 못한 부유해진 이들이다. 아직도 이데오르기를 운운하며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들의 소리를 귀기울이지 못한다. 그들의 이웃은 이제 돈 많이 내고 힘있는 장로나 집사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들의 친구들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믿는다. 그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가르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믿는" 것에 관심은 없다. 그것은 결국 개인의 선택의 결과일 것이고,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도울 수 있지만 그것의 결정은 나의 손에 있지 않다.
  한국 교회는 지금부터라도 믿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와 한국 교회에 해답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시작점으로서는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실제적 삶에 대해 들여다 볼 수 있는 현미경이 될 것이며 우리의 DNA를 확인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