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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한국 유치원 백년.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 유아 교육이 100년이 넘었네요.
최초의 유치원이 경성유치원이라 소개합니다만 네이버 사전에는 정토종포교지원에 의해 설립된 나남유치원을 최초로 소개합니다. 그뒤에 1910년 정동유치원, 1913년 경성유치원이 설립되었습니다. 1914년 현존하는 최고 유치원은 이화유치원입니다. 그리고 1915년에 유치원교사 양성기관인 이화유치원 사범과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일제치하에서 유치원 교육은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민족주의계열, 친일본계열, 그리고 기독교 선교계열입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방법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따라 그 결과는 달랐을꺼라 생각합니다. (만약 같다면 구지 어떤 계열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교육이란 그 저변에 깔린 철학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교육자들이 잘 알 것입니다. 국민들은 그것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의심해보지만 구체적인 행동을 보일만큼 인식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최근 대안교육운동들을 보면 자녀의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한 부모들에 의해 나타난 결과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육에 있어서 보편성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신뢰가 교육계 전반에 깔려 있고, 교육당국 역시 이를 알고 있어서 큰 변화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정치적인 민감성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보다 뜨겁고 즉각적입니다. (누군가는 교육계의 부족함들을 이념논쟁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초등교육 이전의 유아 교육을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의무교육으로 만드는 취지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교육의 철학에 있어서는 왠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첫번째로는 현재 정부의 교육정책은 부모들이 감당해야할 영역(돌봄, 교육의 방향성)조차 맡기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분명 자녀를 집에서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와 교감해야 할 시간을 외부에 맡기도록 유도하는 이런 정책은 가정보다는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과 교감하도록 만듭니다.(여기에는 사회적 노동력 극대화라는 것도 깔려있기도 하죠) 기본적인 애착이 필요한 시기에 서로의 애착이 필요한 존재끼리 붙이는 것은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두번째로는 이성주의에 따른 인간 중심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 인간의 개인/집단 중심으로 발달된 운영 시스템은 유토피아적 기대감을 주었지만 그 실상은 이기심과 전쟁으로 그 결말을 맺었습니다. 아직도 낙관적 이성주의의 환상이 우리 교육 속에는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저로선 교육이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는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른 구원의 필요성을 믿습니다. 종교적 교육의 바리새인과 예수의 충돌은 그 하나의 예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을 통한 근본적 변화를 이끌 수는 없지만 결국 바뀐 동기(구원, 근본적 변화)에 따른 교육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치원 교육은 중요하고 어떤 철학으로 그 교육을 지탱하고 있고, 이끌고 있으며, 발달하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