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홈스쿨만 소명이야?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홈스쿨이 "소명"을 근간으로 한다면, 반대로 공교육에 대해서도 부모의 소명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한국 교회의 "교육"에 대한 소명심은 매우 세속적이고 이기적임에 틀림없다. (다른 영역들도 비슷하겠지만 말이지.)
기독교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어떤 일은 특별한 소명으로 논의하고 다른 이들은 평범하다거나 낮은 신앙의 소유자라 구분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경향을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겠지만 소명을 핑계로 물러나거나 차별화 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이 보편적이고 동등한 부르심의 선상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홈스쿨은 "가정"이 근간이다.
어쨌든 홈스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교적 가치와 전통의 "전수"와 "확산"에 있으며 그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홈스쿨이 20세기 중반에 대두된 것은 사회적 변화(케네디의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금지한 사건)가 기독교의 가치를 건드린 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20세기의 사회 구조가 가족 중심에서 사회, 국가 중심으로 확실하게 옮겨졌음을 교회가 깨닫게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사회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가족의 기능을 사회가 점차 감당함으로 그로 발생된 잉여 시간을 노동력으로 이용(착취)하려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반 대중들은 경제적인 이득과 대중적인 흐름에 의해 이런 현실에 순응한다.
홈스쿨은 그런 의미에서 "전통 가치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홈스쿨은 단순히 공교육의 파행과 불신에 따른 "대안"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대하여 기독교의 본질적인 질문이자 일종의 답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 받지 말 것을 요구한다. 종종 이 말씀이 오용되기도 했지만 본질에 있어서 여전히 우리를 지도하는 말씀이다.
시대의 인본주의는 신을 통해 부여받은 지헤를 근간으로 신을 제거하는 모험(만용)의 결과물이다.(기독교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자란 괴물은 재미있게도 정치적 우위를 점하던 이들의 계급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기득권을 지지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이런 시스템을 유지 보수하려는 관성을 지닌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교육의 태생부터 산업사회를 지지하는 노동자 계층의 배출을 위한 주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교육 페러다임의 변화 참조) 그 시스템은 점차 변화와 세련됨이 입혀졌다. 물론 이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순응하기엔 너무나 많은 위험요소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인본주의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망상을 대중들에게 심기움으로 기득권의 기반을 지지하도록 만든다. 그런 면에서 수용에 익숙한 한국교육은 정치/경제/사회적 요소에 좌지우지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홈스쿨은 그런 세상에 좋은 자극제가 된다. 홈스쿨이 유토피아적 망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공교육을 의심케 한다. 또 다루는 내용도 국가와 사회의 의지보다 가정의 의지가 우선시 된다. 그 속에서 국가를 부정하는 내용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홈스쿨은 거대한 집단의 이익보다 개인의 신념을 우선시하는 환경의 결과다.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한국의 공교육은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더 좋은 대학을 들어가는데 공교육이 충분하지 않다는 불만은 현 신분을 유지하거나, 더 나아지려는 대중들의 의지가 확산된 결과다. 그러므로 이를 보증해 줄만한(적어도 보증할 것처럼 보이는) 교육 옵션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홈스쿨은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한국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에 비해 교육의 전문성에 기댄 나머지 스스로 자녀를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이 교육옵션에 있어서 홈스쿨을 쉽게 선택하지 못한 면도 있다. 또 현실적인 도전은 홈스쿨러들의 대학 진학이 한국의 교육 시스템 속의 아이들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대학진학이라는 것에 매여있는 현실안에서 본다면 홈스쿨은 가치없는 교육옵션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홈스쿨러들이 늘어나고 그들에 대한 평가가 나오게 되는 시점에서는 앞으로 홈스쿨에 대한 정부의 보완계획들이 생겨날 것이라 믿는다.
큰아이가 4학년이니 이제 홈스쿨한지도 벌써 4년이 넘어 간다. 두려움으로 2년을 기다려 시작한 홈스쿨은 4년 동안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곱절이상이니 남는 장사도 이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홈스쿨 가정들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주위에서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두권에 지나지 않았던 홈스쿨 관련 책들도 이제는 읽는 속도를 따를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먼 거리를 마다않고 쫓아다니며 들어야 했던 각종 세미나들도 이제는 아이들 프로그램까지 마련해주는 전문기관에서 들을 수 있고 심지어 안방에서 인터넷으로도 들을 수 있는 강의들도 적지 않다. 홈스쿨을 돕고 때에 따라 교재까지 공급해 주는 지원기관도 있고 홈스쿨러만을 위한 오케스트라까지 있으니 몇 년 동안 홈스쿨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홈스쿨의 한세대를 20년이라고 한다면 아직 우리세대는 한참을 걸어야 하니 우리 부모들은 앞으로 10여년은 더 배움에 투자해야할 것 같다.
실패의 경험과 좌절의 경험도 좋은 교재가 되어야 하고 우리 후세들을 위해 더 많은 눈물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나는 홈오피스에서 사업을 하는 탓에 자녀들의 하루 일과를 모두 지켜볼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직업으로 인해 자녀들의 공부하는 모든 소음과 아내의 훈계, 자녀들의 반응과 태도도 모두 내 오피스에 실시간으로 들려 내려온다. 물론 나의 일하는 모습도 아이들이 언제든지 모니터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환경에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좀 더 자녀들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어 자녀들의 태도와 아내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모든 일과가 노출되어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 어려움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족하지만 홈스쿨의 현장에 있는 아내들의 필요를 조금은 이해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아래 사항은 지극히 주관적이나 많은 홈스쿨러들이 공감하는 것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1. 나는 기독교 홈스쿨러인가?
단순히 부모가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우리 가족이 기독교 홈스쿨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적 홈스쿨러는 교육의 모든 가치를 기독교적 가치를 담아내어야 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단순히 집으로 옮겨놓은 것이 홈스쿨이 아니듯 말이다. 자녀의 영성에 부모의 영성이 끼치는 영향력은 보이지 않는 빙산과 같다. 보이지 않지만 토대가 되고 기둥이 된다. 매일 매일의 말씀묵상과 자녀들과의 말씀 교제는 선택이 아니며 기독교 홈스쿨러의 필수조건이다. 부모 역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모두 홈스쿨이 처음이며 어느 누구도 직접 보여주지 못한 교육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과거 경험적 토대로만 자녀를 양육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큰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생각은 오류가 많고 세상적이며 우리 자녀는 나와는 다른 환경에 있고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으며 주님이 주신 사역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홈스쿨하는 부모들에게 가능한 한 정기적인 홈스쿨 관련 세미나 참석을 추천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경을 넓혀야 하며 우리들의 경험의 오류를 발견 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역의 통로를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다
2. 아버지의 역할
대부분의 홈스쿨 가정들은 아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녀들과 함께 보내며 아버지들은 잠깐의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다. 한국의 경우 이 시간이 더 짧은 것이 홈스쿨 아버지들의 고민이며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몇몇 가정들은 아버지들이 직업을 바꾸기도 하는 등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이러한 한국적 현실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렇게 자녀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지만 정작 자녀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영향력을 더 받는다. 아버지에게 기도를 받길 원하며 아버지와 놀고 싶어 한다. 심지어 아버지와는 공부하는 것도 좋아한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우상과 같다. 아버지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녀들과 함께하는 우리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신 “놈 웨이크필드” 목사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자녀훈계나 기타 교육적인 대부분의 경우도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효율성이 더 높으며 가정에서 아버지의 소극적인 교육적 태도는 자녀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여 홈스쿨하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자녀가 어릴 때에는(약 초등과정 이하) 어머니의 헌신만으로도 아버지의 역할을 조금은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쉽지가 않다는 것에는 우리 세대에서도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다.
홈스쿨의 가장 큰 장점은 아버지의 참여로 인한 신앙과 교육의 극대화이다. 이런 최고의 장점을 묻어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모든 것이 기회이다.
홈스쿨은 공간, 시간, 세대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자녀 모두를 함께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이라는 공간적 제한 없이 어디에서든지 자녀를 지켜봐야 한다. 각종 홈스쿨 세미나나 단체모임에 가게 되면 자녀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가정도 적지 않다. 내 자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늘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런 환경을 통해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내 자녀의 부족한 부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 스스로의 경험만을 통해 얻어지는 사회성은 위험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 부모들은 모든 환경들을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공교육의 자녀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배우고 터득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홈스쿨인 우리 자녀들은 가르치지 않으면 배움의 기회 조차도 없다. 가정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야 한다.
4. 부모의 한계를 극복하자
몇 년 전 밥존스 대학의 물리학장과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밥존스 대학은 미국에서 공교육을 거친 학생, 교회학교 출신 그리고 홈스쿨러 출신 학생들이 거의 비슷하게 입학하는 대학이다. 나는 3가지 측면을 질문하였다. 그들의 신앙관과 사회성 그리고 학업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였다. 학업에 대한 평가가 인상적이었는데 본인의 물리학과의 경우 물리(수학)학점이 가장 높은 학생들이 홈스쿨 출신이며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 학생들도 홈스쿨러란다. 물리학점이 가장 낮은 학생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이 홈스쿨 부모인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왜냐면 우리 엄마가 수학을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의 한계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좋아 할 것이며,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극복해야할 과제 앞에선 내 자녀 역시 절절매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내 자녀들을 우리 부모의 한계에 묶어 놓을 것인가? 내 아내는 영어교육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수학교육에는 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수학을 나에게 맡기었다. 내 전공이 공학이여서 대학에서 가끔 공학을 강의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 아내가 자신없어하는 과목을 나에게 떠 넘긴 것이 더 옳은 표현일듯 싶다. 그러나 자녀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데에는 학교에서의 강의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정성만 필요할 뿐이다. 미리 가르칠 범위를 살펴보아야 하고 1-2년 정도의 학업계획을 수립하여 내 자녀의 수준에 맞게 꾸준한 우선순위만 필요할 뿐이다. 경험이 없다면 남보다 더 시간을 내면 그만이다. 자녀들은 가르치는 것보다 가르침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더 중요시 하며 그 영향력이 더 크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모르면 배우면 그만이다. 우리 부모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모르면 배워서 가르치면 된다. 부모가 아는 것을 가르칠 각오라면 홈스쿨 1년이면 그 바닥이 보일 것이다.
5. 내려놓음
몇 달 전 강남학원에서 사용하는 초등학교 수학 문제지를 대학 수학과 1학년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험성적 결과 강남학원의 초등학생들의 평균과 대학 수학과 1학년 평균과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물론 이 결과가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온전한 결과라고 믿어지지는 않지만 한국의 교육적 관심은 그 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다. 세상적 가치를 담아내려는 데는 그냥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한국적 상황은 홈스쿨이 더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많은 지혜와 균형이 필요한 환경이다. 부모가 모르면 학원에 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학원은 우리의 교육적 대안들을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문가가 아닌 우리 부모보다 효율적이지 못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책 참조) 부모는 자녀의 동기부여를 위해 의식적으로 준비하지만 자녀가 그 의도를 눈치 채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와 관찰이 필요하다. 이런 대부분의 일들은 부모만이 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자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 일부를 내려 놓던지, 아니면 다른 교사에 의지하는 것을 최소화 하여야 한다. 홈스쿨을 위해 자녀들에게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환경이 필요하다면 우리 부모는 도시의 편리함을 내려 놓아야 하고, 자녀와 많은 시간을 갖길 원한다면 다른 일들의 우선순위를 뒤로 남겨야 하며 자녀의 성품과 신앙이 우선적이라면 세상적 가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객관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 조차도 참아내어야 한다. 너무 많은 스케줄에 시달리기보다 단조로운 스케줄로 자녀와의 관계중심을 추천하고 싶다.
6. 우리 아이가 싫어해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자녀들도 처음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힘들고 오래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홈스쿨은 우리 자녀들의 기쁨을 위해 시도하는 교육적 시도가 아니다. 싫지만, 미루고 싶지만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더 많다. 내가 하는 사업도 마찬가지다. 하기 싫고 처음 시도하는 프로젝트라 두려움이 있지만 고객과의 이해가 상반되는 경우 대부분 내가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객이 요청하는 시기에 마쳐야 하고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회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하고나면 고객들은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나에게 득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눕고 싶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매일 말씀묵상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일상이 항상 이렇다면 우리 자녀들에게도 싫지만 기쁨으로 감당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다.
7. 협력과 동역의 기회
홈스쿨은 한국에서 개척지와 다름이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개척자로서 사명감이 필요하다. 홈스쿨이 가족 이기주의로 비치지 않도록 우리는 또 다른 홈스쿨러들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야 하며 협력해야 한다. 홈스쿨협회의 스텝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미나나 각종 행사를 위해 새벽까지 시간을 내어 준비해야하고 회의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스텝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 협력자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홈스쿨 관련 단체 행사를 마련하다 보면 내 자녀외에는 다른 자녀들의 행동에는 전혀 무관심한 부모들을 볼 때가 가끔 있다. 위험한 행동이나 지나친 행동에 대해 내 자녀처럼 제지해야하며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우리 홈스쿨러들은 서로 협력하고 동역하는데 더 적극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홈스쿨하는 많은 가정들을 보면서 도중에 홈스쿨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적극적 추천보다 사명감을 묻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홈스쿨만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신 교육적 기회들을 성실과 지혜로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