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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호기심, 즐거움 그리고 예배로 이끄는 교육/문화

요즘 무언가를 설명할 때 "Dan Pink의 과학에 대한 동기유발"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왜냐 하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외부적 동기와 내부적 동기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생산적인지의 질문을 가지고 내적 동기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영상이다. 

삼성의 성장과 애플과의 충돌 속에서 한국 언론은 애플을 요리하지만 아무래도 살아남을 것은 애플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삼성은 죽어라 만들고 있지만 애플은 즐기며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바로 앞에서 설명한 Dan Pink의 영상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삼성은 외부적인 동기로 운영하고 있지만 애플은 내부적 동기로 운영되고 있으며 내부적 동기로 이뤄진 결과는 구글 세계와 페이스북 세계다. 한국도 그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싸이월드. 하지만 대기업으로 넘어가면서 내수용으로 끝난 건 내부적 동기가 싸이월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를 감지한 이들은 이것이 곧 교육과도 연관됨을 인식할 것이다. 근대화 이후 인간의 교육은 이성과 논리에 따르는 학문토양 속에서 가치를 부여하고 인정했다. 그 결과로 찬란한 이성주의 세계를 건설했지만 그 실상은 파괴적인 이기주의를 대면한 창백함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경계선이 무너지고 생산자는 소비자, 소비자는 생산자의 위치를 겸하는 세상으로 변화되었다. 결국 필수품이라는 것의 정의가 반드시 생존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생활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변하였다. 한마디로 "Survival"에서  "Fun"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 "Fun"은 일종의 "Survival"로 확장되었고.

여전히 한국의 교육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암기"하고 "정답"을 제시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모든 시험은 그것을 테스트한다. 근대사회는 정보가 곧 생명이고 부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정보는 어디서나 쉽게 찾고 접근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정보를 생산하고 나눠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수학 계산을 통해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떤 과정을 통해 답을 찾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것이 애플과 삼성의 대결속에서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이다. 
아이디어는 일상에서 만나는 창작물이지 명령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구본승 CEO에게 퇴임 연구원이 쓴 글 속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재미있게 일하도록 만드는 환경은 한국 사회에서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그동안 우리는 재미있는 일보다 생존을 위해 일했던 시대를 살아온 부모님들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은 20세기를 움직인 힘이 되었지만 21세기에서는 절벽으로 향하는 기차와도 같이 예정된 몰락의 길로 이끈다. 

우리가 다루는 교육도 마찬가지다. 대학입학을 위해 초중고가 달려가고 있는 교육은 결국 대학이 원하는 답만을 위해 노력한다. 공부를 즐기는 소수의 아이들(이드이 소위 엘리트들이다.)에게는 상관없지만 억지로 짊어지고 온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대학은 미래를 배우고 사회에 기여하는 시작점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또 하나의 통과의례이자 짐일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노베이션한 인재를 찾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노베이션해도 그 회사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것들은 그들이 받았던 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노베이션이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된다. 관리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노베이션을 보고 경험하고 깨닫지만 아무도 그 이노베이션한 삶을 국내에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식을 대하는 자세가 새로와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외부 동기가 아닌 내적인 동기, 즉 호기심, 즐거움, 집중을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이뤄지는 모든 수업 속에서 이런 요소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음세대를 살아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자신의 밥줄을 지키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으려면 개인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사회 구조와 기업 구조의 변화도 필수적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어떤 제도와 구조가 이를 방해한다면 그 흥미는 끝날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무도 그 즐기는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채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한국 사회가 달려왔다는 것이다. 지금의 충돌은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동안 당근과 채찍을 통한 기업문화가 성장하여 대기업이 되었는데 그것이 먹히지 않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당근과 채찍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와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관리와 통제 구조 속에 있으면서 활동적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교육계 스스로가 교육이 재미있고 호기심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그것을 주셨으며, 우리는 그 창조세계 속에서 그분의 질서를 발견하도록 지어졌다. 그 질서는 아름답고,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다. 호기심은 아름답고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즐기도록 이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찬양하고, 그분의 성품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며 하나님을 발견함은 찬양이며, 그 경이로움을 갖는 것은 경배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내적인 동기를 통한 활동 그 자체가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살아있는 예배의 실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