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신앙인이건 그 신앙의 진정성은 그 개인의 고백과 삶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고 때론 그것이 나의 몫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을 대면하며 그와 연관된 한 목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신앙은 무엇이며 용서는 무엇이고 또 그건 어디서 올까? 궁금해 진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아들을 잃고, 그 아들을 빼앗아간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찾아갔을때, 이미 유괴범이 누리는 평화를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영상을 보며 우리는 진짜 용서와 신앙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자에게 있어서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잃지 않고서는 모른다.
용서란 가해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진정한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연 가해자들은 진정한 용서의 과정(예수는 그 순서를 첫번째는 피해자요, 두번째는 창조주로 가르친다. )을 밟았는지 의문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진정성에 있어서도 도마에 오를 수 밖에 없다. 1
한국 사회(특히 기독교 사회)는 과거의 상처를 기독교로 포장하여 신앙의 진정성조차 엎어버리거나 뭉게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역사적으로 일제 시대와 남북분단(한국전쟁을 포함해서)의 상황은 한국 교회의 큰 상처를 남겼다. 교회와 교회, 교회와 사회, 사회와 사회의 날카로운 충돌은 신앙적 이슈조차 사회/정치적 이슈와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으며, 그 속에서 용서는 단순하게 한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로 확대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화해란 무엇인가?
그 첫번째는 화목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목제는 깨어진 관계자들이 하나님의 제단앞에 와서 제물을 드리고, 같이 먹으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그 관계 회복의 근거이자 증인으로 하나님을 두는 의미의 행위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그 댓가는 화목제물이다. 그러나 그 전에 상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율법이 먼저 이야기하는 보상이 있다. 이것은 지불되어야만 하는 댓가이다. 그 이후로 화목을 위한 제사가 필요한 것이다. 또 그가 벌인 죄에 대해서는 속죄제를 또 드려야 한다. 하나의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는데에는 복잡한 절차와 댓가를 요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관계가 담고 있는 가치가 얼마나 중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참 귀한 댓가를 지불했다. 바로 두번째 "화해"의 주제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일 것이다. 그분의 죽음에 있어서 요한과 바울은 "화목제물"로 표현했다. 구약에서의 화목제는 가해자가 그 주체가 되지만 신약에서의 화목제는 오히려 피해자가 주체가 된다. 2
이 두가지의 핵심은 화목을 위한 댓가지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제사에서는 가해자의 화목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계약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이 방법을 제공하셨고, 그 가해자인 인간의 상황에 적절하도록 주신 것이다. 두번째 제사는 피해자측에서의 화복 방법이다. 즉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것으로 가해자의 기소사실을 무너뜨림으로 관계의 기초를 새롭게 한 것이다.
과거 '고문기술자'라 불리운 목사의 경이로운 신앙적 체험과 고백을 쉬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보여준 모습으로 인한 의심은 위에서 언급했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경적인 두가지 부분과 연결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해했던 이들의 입장으로 가해의 현장으로 내려가 본 적은 없었던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국가의 정체성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 정당성을 부여하였음을 인터뷰에서 발포했더라.
물론 여기에는 분명 기독교의 초기부터 있었던 신성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이 오늘날 민주주의/자유 시장이 지지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현 시점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오히려 맘몬이즘의 현상이 기독교계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타락을 부추기고 있는 시스템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단지 사회주의에 비해 종교적 관용도가 높을 뿐이지, 체제에 대한 비판의 면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기독교의 이종배합과도 같은 우상숭배는 여기저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그 목사에게 있어서 용서와 화해란 어떤 것이며, 신앙과 목회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신학적 차이를 십분 이해해도 그가 말하는 신앙은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예수의 삶과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음이 나에겐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교회의 대표성을 자칭하는 기관의 모습들과 교회내 소송이 오고가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지나오면서 한국 기독교가 말하는 진짜 가치와 진정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태도가 그런 목사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노선의 문제로 보는 것보다 보다 근보적인 질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기독교인의 나태함과 이기주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종교적인 교회를 분리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며, 그가 민주주의에 어떤 공헌을 끼쳤는지, 그의 실제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 관련된 어떤 분이 자칭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목사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한번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 목사의 진정성을 생각하는 이 행위는 사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어르신들의 위선을 접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역겨움과 동시에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또 그들의 가르침에 침착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경고로 여겨지게 된다.
금년 한해 유독 안타까운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또 2011년을 보내는 끝자락에 한 정치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와 연관되어 한국 교회가 송장냄새를 내고 있다는 역겨움에 글을 써 본다.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마태복음 5:23~24 [본문으로]
-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4:10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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