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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

집단지성은 바벨탑일까?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dr/2048034334/


내 모든 관심은 솔직히 시민운동과 집단 지성에 몰려 있다. 지난 20세기는 인간의 지성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팽배하던 패배감과 자괴감이라면, 21세기는 그런 인간의 조그만 것을 모아 평화를 만드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 자신에 대한 지난 세기의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함에서 모험을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적인 상황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바벨탑

다만 이런 것을 보니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이 생각난다. 결국 인간 스스로 만들어가는 귀결점은 인간 스스로 멸방을 막는 길을 찾는다. 다만 기독교는 그 지향점과 정 반대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구약의 왕정 시대를 회고하던 두 종류의 성경책에서 힌트를 얻는다. 역대기의 교훈은 본질(예배)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선지서는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선한 행위(율법)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다. 이 둘은 같은 시대에 대한 다른 평가처럼 보이지만 실상 같은 이야기다.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벌어진 믿음(로마서)과 행위(야고보서)의 충돌처럼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본질과 행위의 연속성을 만들고 있는지 묻는다. 행위는 본질을 물으며, 본질은 결과를 묻는다. 이 두가지의 판단조건은 기독교인이 시민 사회 집단 지성을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믿는다. 믿지 않은 이들과 함께 사는 사회에서 선한 행위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벨탑이 아닌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그 행위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세상은 "우리"보다는 "하나님"께 귀결되어야 하는 다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반적 은총이라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이 세상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질서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귀결되어야 함은 우리의 최종적 목적이지만 그렇다고 강제성이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믿음의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보편적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집단 지성과 시민운동은 바로 그 부분에 걸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또 우리가 본질(예배)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면 결국 행위로 나오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명제의 충돌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선한 창조물이라는 것과 동시에 죄성을 지닌 불의로 보는 이중적인 관점이 공존한다. 이부분에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의 개선의 가능성을 두지만 또 어떤 부류는 인간의 회복됨은 온전히 죽음뒤에 오는 것으로 본다. 일종의 영지주의쪽인 부류인데, 이런 극단의 형태는 다른 행동의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지난 과거의 기독교 역사와 신학 논쟁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그럼에도 본질에 따른 행위(개선)와 노력(일종의 성화라 표현해도 될까?)은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

출처. MKBN
 
과거 카리스마틱 구조나 유교적 구조(수직/명령)에서 서구의 수평구조(잠여/소통/배려)의 운동으로 움직여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고 지양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결국 시민운동과 집단 지성운동 모두 지속되고 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조금 더 나은 개인의 참여와 선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 본인이 우리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으며 균형을 잡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묻고 성찰하는 일은 운동에 참여하는 "나"에게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과제이자 시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