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양육"이라는 주제가 풍기는 인상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임과 동시에 부모의 책임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시대를 초월해서 그 자녀가 자신의 길을 펼쳐가는데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와 달리 누군가의 경쟁을 통해서만 생존을 이룰 수 있다는 시대적인 아픔을 안고 있어서인지 더욱 더 자녀 양육이라는 것은 상업적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는 교회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분명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의 잘됨을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당연한 본능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갈구하는 것 역시 본능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자녀 양육'이라는 단어가 삶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역시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지만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들의 어떤 욕심으로 인해 자녀들을 버려두기도 합니다. 또 아픈 가족사가 있어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 자녀의 성장의 다른 한편에서 비교되는 누군가들의 무관심과 무신경, 미움, 분노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우리 자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별로 큰 소리가 되지 못합니다. 돈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게 아니니 차라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귀와 눈을 막으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가난했지만 함께 마을이라는 일종의 공동체가 존재했던 지난 시간이 더 좋았는지 모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는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마을의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육아라는 숙제만큼 우리에게 의미있고 실제적으로 풀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내 이웃을 내몸 같이"라는 가치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 가족에서, 교회, 이웃, 사회로 확장하여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자녀 양육이 "자녀의 지적, 정서적, 육체적, 성격적 발달을 돕는"행위로 정의한 사전적 의미를 따른다면, 공동 사회적 양육을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 역시도 확대된 의미에서 자녀 양육으로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라는 시선에서 "우리"라는 시선으로 넓혀서 볼 수 있는 지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교회는 이런 가치를 반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준비된 곳입니다.(이론적으로만 보면 말이지요.) 다만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개인주의와 상업주의의 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나"의 성공에 집착하도록 만들어 사회를 더 삭막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기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존재가 이기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타주의에 대한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기주의를 버릴 수 있는 시스템에 기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가치를 보다 건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자녀 양육법과 동시에 사회의 자녀 양육을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녀 양육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더우기 산업사회로 급속한 전환을 이룬 지난 과거를 돌아본다면 전근대화 시절보다 더 빈약한 자녀 양육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자녀의 양육을 기능적인 면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인지 학습을 자녀 양육의 전부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받지 못했거나, 받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내 자녀에 적용하기엔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린 시대적 분위기속에 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낯섬과 두려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내 가족에서 마을 단위의 규모로 확장시켜 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조금은 지금보다 남을 의지할만할 것이고, 직면한 난제들에 공동의 대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큰 모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의지, 그리고 몇몇 동지들이 있다면 우리는 조그만 발걸음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도 속에서 나의 자녀 양육에서 우리 자녀의 양육으로 확장할 철학과 근거들이 흘러갈 것이고, 그런 모델들은 평가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시도들이 실패하더라도 격려해 줄 수 있는 일말의 여유/관심이 적어도 내 안에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갈구하는 것 역시 본능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자녀 양육'이라는 단어가 삶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역시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지만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들의 어떤 욕심으로 인해 자녀들을 버려두기도 합니다. 또 아픈 가족사가 있어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 자녀의 성장의 다른 한편에서 비교되는 누군가들의 무관심과 무신경, 미움, 분노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우리 자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별로 큰 소리가 되지 못합니다. 돈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게 아니니 차라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귀와 눈을 막으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가난했지만 함께 마을이라는 일종의 공동체가 존재했던 지난 시간이 더 좋았는지 모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는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마을의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육아라는 숙제만큼 우리에게 의미있고 실제적으로 풀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내 이웃을 내몸 같이"라는 가치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 가족에서, 교회, 이웃, 사회로 확장하여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자녀 양육이 "자녀의 지적, 정서적, 육체적, 성격적 발달을 돕는"행위로 정의한 사전적 의미를 따른다면, 공동 사회적 양육을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 역시도 확대된 의미에서 자녀 양육으로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라는 시선에서 "우리"라는 시선으로 넓혀서 볼 수 있는 지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교회는 이런 가치를 반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준비된 곳입니다.(이론적으로만 보면 말이지요.) 다만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개인주의와 상업주의의 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나"의 성공에 집착하도록 만들어 사회를 더 삭막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기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존재가 이기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타주의에 대한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기주의를 버릴 수 있는 시스템에 기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가치를 보다 건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자녀 양육법과 동시에 사회의 자녀 양육을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녀 양육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더우기 산업사회로 급속한 전환을 이룬 지난 과거를 돌아본다면 전근대화 시절보다 더 빈약한 자녀 양육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자녀의 양육을 기능적인 면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인지 학습을 자녀 양육의 전부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받지 못했거나, 받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내 자녀에 적용하기엔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린 시대적 분위기속에 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낯섬과 두려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내 가족에서 마을 단위의 규모로 확장시켜 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조금은 지금보다 남을 의지할만할 것이고, 직면한 난제들에 공동의 대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큰 모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의지, 그리고 몇몇 동지들이 있다면 우리는 조그만 발걸음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도 속에서 나의 자녀 양육에서 우리 자녀의 양육으로 확장할 철학과 근거들이 흘러갈 것이고, 그런 모델들은 평가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시도들이 실패하더라도 격려해 줄 수 있는 일말의 여유/관심이 적어도 내 안에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Edu in Divers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도현-화려한 스펙을 버리고 골목을 누비다 2013 행복한 진로 학교 1 (0) | 2013.05.31 |
---|---|
진로교육학회, 자유학기제에 대한 포럼 참석. (0) | 2013.05.25 |
관문과 목적지는 다르다. (0) | 2013.03.26 |
교생선생님에 대한 기억. 그때의 수업이란... (0) | 2012.04.15 |
기독교 학교에 필요한 것. "현재"를 안고 가는 역사인식 (0) | 201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