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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곧 오소서 임마누엘



"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
 
 이 시대를 살면서 나를 구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되뇌인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가득하고 또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사유한 결과이기도 하다. 삶이란 끊임없이 부정되거나 도전받고, 구도의 길로 묘사되듯 고통의 증상이자, 그 자체일 수 있다.
붓다가 그의 성을 나서며 만난 삶의 실체에 대한 충격은 그로 하여금 구도자의 길을 떠나도록 만든다. 그리곤 종교 지도자로, 숭배의 대상으로 오늘까지 내려온다. 그는 수많은 서민들의 삶을 내려보고, 도를 전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붓다는 왕-구도자-종교지도자라는 엘리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유할 여유와 근거가 있었고, 생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였다. 백성은 알몸으로 던져진 세상에 순응하고 주어진 생명을 보존해야만 하는 소유된 이들이었고, 사유의 여유와 삶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길거리에서 만난 희원이보다 한두살 많음직한 아이가 돌안된 아이를 안고 한 손엔 우유병을 들고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내 다리를 찔러가며 구걸하는 눈빛을 던지는데, 나는 차마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인생의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또 자유로운 본능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런 질문의 본능적 행위 자체조차 사치일 수 있는 이들도 있다. 그것도 많이. 그래서 내가 기도하는 '구원'과 내가 바라보는 이들을 향한 구원,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다른 의미일 수 있고, 그 행위들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 사유의 결과들, 주어진 신앙의 유산들이 버겁고 하나님의 불공평함에 질문을 던진다. 그 아이의 시선을 피한 나의 비겁함에는 그 뒤에 있을 탐욕스런 어른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뚝뚝이를 타고 호텔에 머물고 있으며 비행기를 마음먹으면 탈 수 있다는 그 위치의 삶을 인식하게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라는 존재가 지구상에서 처한 위치를 말이다.

 아침에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고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가운데 내 입에서 나온 고백의 노래. 아마도 나의 입장에서 그 아이들에게 평화, 구원이라는 것이 오길 바라지만, 그 아이들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이 무엇일지는 예전처럼 쉽게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을 살면서 나의 고단한 짐들은 어쩌면 사유로 얽혀진 현대 사회의 어그러진 구조와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욕심들이 타인의 삶과 얽혀지면서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구원이란 내가 믿는 가치들이 이 세상에 보편적으로 흘러 내면에서 충돌하는 삶의 모순들이 없는 그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하나님을 만난 욥에게 있어서 본다면 인류의 보편적인 모순의 삶 속에서 받은 응답은 구원이었고 해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런 욥과 같은 해방과 평화를 바란다. 그분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해방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면해봐야만 알 것 같다. 그분에게 있어 해방, 평화, 구원, 자유는 곧 심판과 같은 의미이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