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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가족이라는 변수. 부제: 우리의 무비판적 낙관론의 근원은 생활계획표 때문이다!

가족의 존재란 불편하면서도 나를 성찰하게하는 중요한 요소다.
아니 어쩌면 존재, 그 자체가 나인지 모를 일이다.
존재들의 하나 하나가 만드는 변수들이 조합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인 듯 싶으면서도 돌아보면 어떤 궤적을 찾아내는 그런 항해의 배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거란 신화를 나침반 삼아서 말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혈연집단의 연속성을 우리는 그리도 붙들고 있나? 답없는 질문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은 아마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의 극대화된 지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사회는 가족의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일까? 싶은 마음도 든다.
어제 2015년의 마지막을 가족 예배로 고안하면서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혼돈을 경험하였다. 매 해마다 가족이 모여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가장 좋았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들을 나누며 돌아가는 시간은 여러가지로 풍성했다. 그 이야기를 하다보면 일상에서 나누던 이야기보다 깊은 심연의 이야기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특히 슬픈 기억들은 우리 각자의 정체성과 현 위치를 확인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쁨보다 슬픔은 우리의 경험 속에 고통이지만 종종 우리를 이해하고, 서로와 깊어지는 관계의 자리를 선물하곤 한다.

그러나 올해 예배는 안일했다. 예배의 순간에 이제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희원이(첫째, 6)가 나래(둘째, 3)와의 만남을 통해 노이즈가 증폭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시작부터 산만한 예배는 결국 마지막 나눔까지 산만하게 마무리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하곤 했다. 그러나 곧 잊혀진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걸 우리는 곧 잊는다. 왜일까? 성장의 신화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정리 못하는 나를 보면, 정리 못해 혼나는 희원이를 대면할 때 가슴이 덜컹거린다. 맥락에 없는 말을 하면서 억지부리는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볼 때도 덜컹거린다. 나는 전심을 다하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보이는 모습은 그런 거... 그런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노력하면 변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어느정도 그것은 작동한다. 다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고 또 그려본다. 어떤 모습이 될지에 대한 기대치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란 의심은 안드로메다로 보낸채 말이지...

아무래도 국민학교 때 낙관적 기대 속에서 그려댄 방학 생활계획표로 연습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