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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일기

오랜만에 쓰는 일기

1. 요 며칠 몸이 불편해서 정상적인 일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제 오후부터는 침대에 달라붙어야 했다. 치명적인 편두통이 온 것이다. 어제 저녁은 막 퇴근한 아내가 두 아이를 모두 챙겨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1호가 장염이어서 이런 저런 신경쓰이는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제 만들었던 수비드한 닭가슴살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 저녁식사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오늘 아침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막상 일어나니 두통은 사라졌지만,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찾아와서 침대에 붙어야만 했다. 1호는 혼자서 아침을 먹고 준비를 해서 등교해야만 했다. 2호도 간신히 일어나 챙겨준 아침을 먹고 모든 준비를 스스로 마쳤다. 몸을 좀 추스리고 2호를 유치원에 늦은 시간에 데려다 주었다. 어제에 비해 날씨가 꽤 추워져 서로 몸을 붙이며 등원했다. 모처럼 아이들이 컸다는 걸 느끼는 아침이었다.

2. 병원에서 위경직때문인것 같다며 이틀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것뿐이었다. 주일날 서울로 올라오면서 마신 커피때문에 시작된 이 사단이 단지 위경직이라는 진단에 허탈해했다. 더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어야 했는데, 허탈함이 밀려오는 것은 뭘까? 싶더라. 당분간 죽으로 살아야 해서 근처에 있는 본죽에 가서 잣죽을 사가지고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이 버겁기는 했지만 15분 정도 걸어 올라왔다. 아마도 위경직이라는 진단은 내가 가만히 앉아 생활하던 습관때문이라는 스스로의 자책이 더해져 움직이려 했던 것 같다.

3. 올라오면서 '엄마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4년간 가정주부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만 나름 집안 살림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부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차별이었다. 결혼한 여성이 전업주부라는 요상한 타이틀을 달면 갖게되는 차별을 몸으로 느꼈다. 내 몸이 아프니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주부는 아플 수 있을까?' '엄마는 어떻게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엄마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없으시다. 아파도 가족의 삶을 뒤에서 조력하던 여러 모습들이 걸어가는 다리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다가왔다. 그럼에도 엄마의 행위는 결코 드러나지도 않고, 자랑도 안된다. 그런 금기는 지금의 내가 '내가 이러이러 했다.'라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칭찬이나 위로를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다. 아마도 내가 다른 성을 가진 남성이어서 받는 것이리라. 패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이지만, 우리 시대는 아직도 어떤 행위보다도 어떤 위치에 따라 판단을 받는 시대에 있나보다.
4. 어제 아내가 마음이 상해서 왔다. 학교에서 불편한 상황이 생겼는데, 내가봐도 불합리한 경우였다. 그런데 나는 침대에 누워 내 아픈 머리만을 신경써야만 하는 처지여서 건성으로 답했다. 아내는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전하며 기도해 달라는 말로 마치는 것을 옆에서 듣기만 했다. 하나의 질서로 고착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행위들을 깨뜨리는 것에 강하게 서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공감과 이해의 자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누구보다 남;편이 아닌 내편으로 존재하는 것이 배우자라는 것도. 감사하게도 나와 아내는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귀한 삶을 나눠받고 있다. 그래서 그 약자의 편에 서려는 용기가 생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도 우리도 내 자녀에게 그렇게 용기도 공감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5. 2호가 아침에 어지러워 하는 내 옆에 누워줬다. 그 따스한 온기가 내게 전해오니 편안해지더라. 약간 살아나서 이렇게 일상을 나누는 이 순간, 그 온기가 다시금 감사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