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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국가적 큰 손실로 비춰진 재외국민자녀의 잠재력 허상

재외국민들이 비 서울권 지역까지 그 수가 확장되면, 한국 대학에서의 학업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신이 자란 나라로 돌아가는 재외국민 대학생들이 늘어날 것이 예상된다. 미래의 글로벌 한국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인 재외국민 대 학생들이 한국의 대학 생활 혹은 졸업 후 한국에서의 학업과 생활에 적응하지못하 고 다시 해외로 돌아간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연구글에서 

영화 "태양의 제국"에서 주인공 제이미(크리스챤 베일)가 초반에 보여준 상하이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TCK의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TCK의 기원이 된 배경은 인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었고, 시기도 태양의 제국이 다룬 상하이 점령에서 20년이 지났다는 점, 그리고 이동 수단도 배에서 비행기로 전환된 큰 차이가 있긴 하다. 배는 이동하는 시간만큼 재입국의 충격을 완충하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비행기는 하루나 이틀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니 문화적 충돌에 완충할 여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구글)

연구논문을 훑을때마다 낯간지러운 건 소위 TCK 재외국민을 다룰  국가적  손실”이라 부를만큼 그들의 잠재력을 어필하면서 연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정말 국가적으로 큰 손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이런 믿음이 발현되었는지 생각하곤 한다. 나름 추측하기로는 재외국민 또는 TCK들이 주로 경제적, 사회적 상위계층의 자녀들이었고, 국가를 대표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대표하는 이들의 가족이었기에,  자녀들이 누릴  있었던  역시 부모의 특권과 별다르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가 계승된 결과라고 생각한. 이는 TCK를 정의하는 책에서도 그 특징 가운데 경제적 상위계층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힌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이런 정의를 적용하기 무리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한국의 재외국민자녀들은 앞서 정의했던 TCK 개념에 적절했던 시기가 무척 짧은데다가, 생존형 해외거주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선교사들의 자녀들도 포함된다. 이런 측면에서 TCK 정의에서 그동안 다루었던 성격들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화에 따른 국제이동의 보편성은 TCK 정의에 더 큰 이슈이지만 여기서 다루지 않은 주제이기에 여기서는 건너뛴다.)

재외국민자녀의 잠재력 이슈는 본국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국가적 큰 손실'이라 부를만큼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또 그 손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사실 아이의 능력보다 부모의 역량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즘도 논란이 되는 것은 부모들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는 점인데, 앞서 언급했듯 TCK의 전통적 개념으로 봤을 때,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역량이 자녀들의 역량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면 이 부분은 확실히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게다가 최근의 상황을 보자면 재외국민 자녀들이 언어의 측면에서 비교적(!) 우위에 있지만 국내 대학에서의 적응문제는 바로 학업량에 따른 차이를 드러내고, 모국어 문제로 대학생활에 어려움이 있다. 사실 그러한 어려움때문에 그들을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있고, 그들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접근의 근본적인 문제는 재외국민자녀들이 한국의 교육과정을 잘 통과한다면 그들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전제에 있다. 즉 그들의 잠재력과 원주민 자녀들의 잠재력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국가적 큰 손실'이라 불릴 만큼 큰 인적 자원의 누수를 겪고 있다는 표현이다. (물론 그 표현이 갖는 정서적 측면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학술 연구에서 그런 표현은 수치적으로 다뤄야 하는 건 아닌지 싶다.) 

또 그들이 한국 대학과 사회에 들어와서 겪게 되는 상황들이 문화적 낯섬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이들도 비슷하게 겪는 사회적 문제들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견디는 데 조금 더 익숙하다는 표현이 맞지 않나 싶다. 해외에서 성장한 이들이 모국어에 대한 익숙함을 미리 준비하더라도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습득하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순발력과 정확성으로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을 대면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특례입학을 통해 진학하는 이들은 여러 면에 있어서 국가의 '서비스'차원의 수혜자라는 시선을 감내해야만 한다. (서비스라는 표현은 서울 모 대학들의 입사정 담당자들과의 만남에서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학습과 경제적 지원에 대한 호소들을 생각한다면, 재외국민자녀에 대한 지원 논의는 형평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모든 청년들의 잠재력을 논하면서 그에 대한 적응과 지원을 다루는 지점에서 재외국민자녀의 지원을 고려하는 것이 구조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생각하기

특정 경험을 근거로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기존 집단에서의 포용과 지원을 위한 여정을 다룰 때, 중요한 몇 가지의 표현들이 있는데, '기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사를 만드는 경우를 본다. 돌아보면, 기존 원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성과를 보였을  시민권을 제공하고직업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사례를 볼 수 있다 사회마다  수용의 강도들이 다르고방식도 다르지만우리의 경우를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과 함께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동화성과 배타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그래서 외부인들이 내부에 속하기 위해서는 정주인 문화에 대한 동화적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혹 피부색이 다르고국적이 달랐던 흔적이 있는 수용된 이들의 경우 동화적 태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배신 낙인을 받게 된다그에 비해 재외국민들은 이런 면에서 조금  자유롭지만, 그들의 개인적 특성으로 인한 갈등을 종종 문화적인 차이로 환원시켜버리는 문제를 안고 있다. 어쨌든 이런 한국 사회의 경향성은 현대를 지나면서 내부적으로 여러 잡음을 만들고 있는데사안에 따른 층위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성해체적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무관하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스파이더맨'이라 불리던 말리 출신의 이민자 '마무두 가사마' 사례가 최근 잘 알려진 기여의 사례다. (사진출처. BBC코리아) 

  기여 대해 말하자면,  개인들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에 기여 하면서 동시에 받는 공생적 상호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운데 특정 배경의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타파하기 위해 집단화하여 어필하는 방식에는 사회내 상호성을 이용한다. ‘기여 어떤 공동체/집단이든 포용성을 어필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다. 그래서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사회내에서 자신의 집단이 정주집단에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려 노력한다.(혹 정주집단에 포용되어도 그들의 적응과정은  다른 문제다.) 그렇기에, 재외국민자녀에게 있어 "국가의 국제적 인재"라는 가능성은 정주 사회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줄 수 있다는 '기여'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과거 선교사 자녀 교육 방향성에서 언급된 세가지 방향성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교사자녀 교육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는 글 

 

2020년 2월 11일 MK연구 단상

MK사역과 관련된 글을 준비하다보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자료들이 있다. 그 하나는 MK NEST에서 발간한 저널과 박순남 선교사가 모아 편집한 MK핸드북, 그리고 폴락 부자와 벤레켄의 공저 TCK다. 그

barny.tistory.com

 

다시 돌아와서, 재외국민자녀들이 갖고 있다는 다중문화 경험과 성장의 특징이 한국에서 성장한 아이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것이 있다는 전제를 의심없이 수용하는 연구들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재외국민자녀들이 경험하는 성장기의 다중문화의 경험들이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그들의 탁월성 발현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정주 집단 아이들과 비교하여 찾은 재외국민자녀들의 우월성은 그들의 이주 시기나 거주 기간, 거주 국가, 주변환경, 그리고 교육기관 등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무시한 일반화의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들의 부모 역량의 차이를 간과한채 개별성, 또는 집단의 문화적 특성에 한정해서 다룬다면, 최근 한국 사회의 부모 역량에 따른 논란들 속에서 표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딱히 결론을 내려는 건 아니지만, 소위 재외국민자녀의 잠재력은 개인의 특성과 부모의 역량, 그리고 각각이 처한 환경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과 함께 교차문화가 더이상 재외국민자녀만의 경험이 아닌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가족, 개인이 경험한 현지의 특성에서 비롯된 교차문화의 경험을 가진 개인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