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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 in Diversity

진로의 이야기를 하자면...

부모교육을 할 때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부모인 내 입에서 아이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 큰 영양가가 없음에도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좀 더 전달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무리하게 잡았다. 수능이 끝나고, 하나 둘 페북 타임 라인에 이야기들이 올라온다. 그 사연도 가지가지다. 거기서 반수라는 것도 처음 들었다. 그렇게 완주한 아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그것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했을 마음을 붙들었을 부모의 마음에 위로의 마음이 생긴다. ‘토닥토닥’

재외국민자녀 진로를 붙들었을 때, 처음 생각은 여느 진로교육처럼 7학년 즈음에 진로탐색을 시작하고, 11-12학년 즈음에 대학 또는 현장으로 나가는 과정으로 디자인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성향과 처한 상황들이 각양각색이었는데, 현장에서는 그런 차이점들을 조율하지 않은 채 진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상황들, 또 많은 지인들의 여정들을 돌아보면서 그런 차이점들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보건데, 진로교육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은 진로교육의 당사자인 아이들 보다는 이를 지원하는 부모들이며, 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거기에는 아이들이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가 바로 부모이며, 그것을 물심앙면으로 지원하는 이도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진로교육은 아이들의 진로 탐험 여정과 부모의 가이드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섞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변명해 보자면 아이와 부모는 ‘한 배’를 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부모교육과 진로교육을 구분하고, 진로교육은 자기이해와 세계이해, 그리고 탐색 여정으로 구분한다면, 부모교육은 세계이해와 자녀와 이별여행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여기서 오늘 이야기하고픈 것은 ‘이별여행’이다. 그 여행의 중심은 두 개의 키워드 ‘동행’과 ‘만족’이며, 각각의 목표는 ‘관계의 거리두기’와 ‘예절’, 그리고 ‘나의 삶’을 수용하는 것에 있다.  

‘진로’가 우리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잘은 모르지만, 내 경우를 보자면, 10여년 전 즈음 ‘대학가기’에 대한 적절한 대안개념이 필요했던 지점이었고, 단어 선택의 배경에는 2000년대 중반에 조한혜정 선생님의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를 읽으면서 갖게된 실마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그건 ‘하자센터’를 뒤늦게 알게되면서 아이의 자율성이 미래 세대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마음 한켠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 같다. 어쨌든 그런 배경에서 대학의 역할이 점차 ‘취업’의 관문으로 필요한 스펙으로 전락한 그 어느 지점부터 ‘대학’대신 ‘진로’라는 단어를 두었고, 거기에 대학 입학 여정을 포함시켰다. 좀 더 기술적인 부분들은 결국 돈을 부어야 하는 영역이기에 적절한 곳에 돈 붓기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교육 목표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개념에서 나름의 커리큘럼을 만들었지만, 그 너머에는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여 그 길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을 은연중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야만 부모가 양육에서 짊어질 무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부모라는 위치, 특히 엄마의 역할이 과거와 다르게 사회활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성취감’만이 아니라 ‘생존’을 담보하고 있으며, 한 사람으로써의 자존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아버지의 양육 참여가 참 반가운 것은 바로 그 짐을 나눌 뿐만 아니라, 교감의 폭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사회의 자녀 진로는 상당부분이 어머니의 몫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명문대 입학의 3요소로 엄마의 정보력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아빠의 관여는 아이의 조밀한 컨설팅을 흔들지만, 정작 책임지지 않는 것이기에 배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자녀의 진로를 만드는데 중요한 구조를 담당하고, 채워가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엄마의 사회활동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요인, 즉 자존감은 자신의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자녀의 성공적 대학 입학으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낙후된 공간에 갇혀 있는 십대들과 인류학적 여정에 나섰던 조한혜정 교수가 이번에는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그들과 함께 시대적 위기를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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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기의 진로 결정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아이의 흥미와 관심을 빨리 찾게 되면, 그 여정의 재정적으로 시간적으로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입학대학의 서열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아이가 보여준 흥미와 관심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리고, 부모교육과 진로교육은 이런 배경에서 아이의 흥미와 관심 시기를 진로 탐색의 시기로 보고, 아이의 성향들을 검색하여 맞춰보면서, 진로를 설계해 간다. 그리고, 대학은 진로의 전문성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서 무엇을 하는지, 또 어떤 곳인지는 별 관심이 없다. 그건 대학의 문제니까.  그렇게 나 역시 비슷하게 그 구성의 내용들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 발견한 것은 내가 갖게될 ‘안도감’을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에 어느 한 부모가 자녀의 기술을 발견하고, 그것과 관련된 지원을 하고 있는 모습에 부러워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왜 부러워했을까? 그건 아이가 ‘미래를 결정했다!’는 것에서 느끼는 안도감이었고, 적어도 그 하나의 길만을 보며 같이 달려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아이들이 좌충우돌하는 진로 여정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기 때문에 오는 초조감이 내게 있으며, 혹여라도 고등학문으로의 여정이 늦어짐으로 오는 당혹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마도 나는 내 정체성 안에 어느새 내 자녀를 일부로 받아들였고, 그들과의 동행에서 오는 갈등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동행’이 의미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불안함이라는 위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의에서 매번 말하던 ‘기댐’이라는 것의 현실적인 무게감을 이제서야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성공적 진로 부모의 여유로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포함되어 있으며, 부모의 활동에서 발생되는 긴장감들을 적절하게 해소하는 기술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여유로움 기준은 가정마다 다를 밖에 없다. 가정이 가지고 있는 DNA 다르고, 목표도 삶의 배경들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다르다.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를 뿐만 아니라, 필요한 손길도 다르다. 그리고 이를 대하는 부모의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여유'도 다르다는 점이다. (종종 간과되는 부분이다.) 사실 속도가 빠른 현대 사회의 경우 이런 차이들은 매 순간마다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나 순간에 직면한 가정들은 그때 그때, 절실함과 긴장감의 강도는 하늘과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그리고 이를 견뎌야 할 부모들도 처한 상황들만큼이나 다를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 진로이야기는 부모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이해한다면, 그 여정에서 부모는 자녀의 양육이 곧 자신의 진로이야기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정량적일수 없는 우리의 인생에서 자녀와의 만남, 동행은 우리의 '태도'와 직결되며, 자녀 양육은 거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이의 진로여정은 우리의 인생마냥, 좌충우돌이며, 변덕이 죽끓는 듯 수 없이 바뀌는 순간들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흥미로운 것으로 여기거나,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서 떠 안은듯 우울하기도 하며, 롤러코스터처럼 업다운이 넘치는 스릴넘치는 것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아이의 미래와 결코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이 갑자기 우연하게 찾아오는 것임을 다시금 다짐해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기다림'과 '인내'이며, 이미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는 참 쉽겠지만, 내 진로에 있어 '참을 인'을 새기며 순간 순간을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느때보다 절실하고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KR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