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ge of Life/삶의 언저리 (147) 썸네일형 리스트형 2013. 8. 4. 밀양(密陽) 그렇게... 관념적일 수도 있고, 속임일 수도 있다. 세상도, 종교도, 나도... 옛 사역자를 만나면서, 교회란... 오랜만에 만난 옛 YWAM 청소년 사역자들... 옛 추억돋는 별명들을 불러대며 흥겹게 이야기했다. 벌써 두분은 선교사로 해외에 있고, 나머지는 사역자거나 그 아내로 대부분이 살고 있다. 15년이 넘는 시간을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랄까? 하지만 모여서 이야기하는 건 ...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거기에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던 나는... 뭐냐??? ㅠ.ㅠ 그렇게 이어져 오늘 모여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교회가 아닐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기도제목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서로의 삶을 격려하고 세워주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간증하는 그 자리... 또 서로의 필요에 반응하면서 연약함을 채워주는 모습에 새삼 교회란 이렇게도 이뤄질 수 있.. 오늘의 노래 세상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여전히 삶의 자락이 언제인지 모르는 공포의 시간을 천진난만하게 보낼 중동의 그 어느 나라의 아이들, 납치와 전쟁기계, 성노예의 찰나 속에 살고 있을 아프리카의 땅, 삶을 연명할 끼니 조차 찾기 어렵고 폭력으로 소망없음에 죽음을 대면하는 땅, 그리고 부요함 속에서 폭력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 모두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려 주시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라 일컫는 교회가 갈등과 긴장의 원흉이 되지 않고 평화를 노래하길 바란다. 보스톤의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오늘, 나의 기도제목이 또 이렇게 생겼다. 위로의 노래가 보스톤과 함께 하길.... 2013년 봄 기도 편지 “MK 사역은 MK가족 사역이어야 한다.” 사라 마 선교사 바쁜 일정 덕택에 어떻게 추운 겨울을 보냈는지 가물가물하네요. 간질간질 따스한 봄볕은 이런 건망증을 더욱 부추깁니다. 그래도 나이 탓은 안합니다. GMTC를 마치고 순식간에 지나간 지난 이야기를 나누려니 주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하네요 1. GMTC 수료. 이제 선교사? GMTC가 제 인생에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아내와 선교적 비전을 위해 내딛은 구체적인 한 걸음이자 가족이라는 배가 먼 바다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이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먼바다의 파도를 맛보았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선교사들의 이동과 자녀 양육에 대한 현실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GMTC의 수료는 이제 해외에 있는 MK사역 현장으로 바로.. 작은 것도 소중히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면 큰 것도 함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이든 세속적이든 다정한 시선으로 작은 것을 바라봐 주면 좋겠습니다. 큰 거 잘하고 작은 것 못하는 것은 선전이고 작은 것 잘하고, 큰 것 못하는 것은 그릇의 문제입니다. 그릇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튼튼한지, 그리고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면 선전은 크고 작은 것과 상관없이 미화되고 덧칠한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미화하고 덧칠한다는 것은 부실한 그릇이라는 것이겠지요.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삶의 질은 균등하게 세상을 섬김은 차별화된 능력으로." 인간의 본능을 거스리고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 이것을 인간성(Humanity)라 부른다. 기독교적 언어로는 성화의 삶. 세상은 교육을 통해 진화됨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인간이 본성(죄)을 용서받음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을 보면 세상도 없고, 기독교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인류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다.는 독백만을 중얼거린다. 2013년의 기도 슬픈 소식은 계속되고 있다. 또 언론은 시끄럽다. 아마 몇몇 개신교인들도 시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그리 따스하지 못하다. 그들 옆에 한번이라도 있어줄 생각을 해봤는지...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는 그런 이라는 의미임을 알까? 세상에 소망이 있다 말하는 기독교는 소망을 선언하지만 양치는 소년의 말처럼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절망을 마주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는 어디서 줄 수 있는가?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도 괴리감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교회="" 공동체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약하디="" 약한="" 개인이다... "교사"선교사 인가? 교사"선교사"인가? 저는 교사선교사를 찾고 동원하는 일을 합니다. 비록 제 자신이 그 일을 하는데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가끔 교사선교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선교사라면 선교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교사"라는 수식어를 구지 붙이는 이유는 아마도 교사의 역할이라는 기능성때문이며 MK영역이라는 독특한 자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교사 선교사의 위치는 교직이라는 직분이 아닌 선교사의 정체성으로 교사의 기능성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요즘 제가 MK현장에서 일하시는 교사들(단기 교사를 포함하여)에게 느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 봅니다. 선교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지점입니다. 그건 모험이니까요. 그동안 살아온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이전 1 ··· 4 5 6 7 8 9 10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