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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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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도 소중히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면 큰 것도 함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이든 세속적이든 다정한 시선으로 작은 것을 바라봐 주면 좋겠습니다. 큰 거 잘하고 작은 것 못하는 것은 선전이고 작은 것 잘하고, 큰 것 못하는 것은 그릇의 문제입니다. 그릇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튼튼한지, 그리고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면 선전은 크고 작은 것과 상관없이 미화되고 덧칠한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미화하고 덧칠한다는 것은 부실한 그릇이라는 것이겠지요.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삶의 질은 균등하게 세상을 섬김은 차별화된 능력으로." 인간의 본능을 거스리고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 이것을 인간성(Humanity)라 부른다. 기독교적 언어로는 성화의 삶. 세상은 교육을 통해 진화됨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인간이 본성(죄)을 용서받음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을 보면 세상도 없고, 기독교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인류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다.는 독백만을 중얼거린다.
2013년의 기도 슬픈 소식은 계속되고 있다. 또 언론은 시끄럽다. 아마 몇몇 개신교인들도 시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그리 따스하지 못하다. 그들 옆에 한번이라도 있어줄 생각을 해봤는지...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는 그런 이라는 의미임을 알까? 세상에 소망이 있다 말하는 기독교는 소망을 선언하지만 양치는 소년의 말처럼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절망을 마주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는 어디서 줄 수 있는가?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도 괴리감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교회="" 공동체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약하디="" 약한="" 개인이다...
"교사"선교사 인가? 교사"선교사"인가? 저는 교사선교사를 찾고 동원하는 일을 합니다. 비록 제 자신이 그 일을 하는데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가끔 교사선교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선교사라면 선교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교사"라는 수식어를 구지 붙이는 이유는 아마도 교사의 역할이라는 기능성때문이며 MK영역이라는 독특한 자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교사 선교사의 위치는 교직이라는 직분이 아닌 선교사의 정체성으로 교사의 기능성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요즘 제가 MK현장에서 일하시는 교사들(단기 교사를 포함하여)에게 느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 봅니다. 선교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지점입니다. 그건 모험이니까요. 그동안 살아온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
12월의 멘붕. 요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 그건 "멘붕"이다. 그것도 이 12월에 모두 벌어졌다. 마치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온 제자들이 직면한 문제들... 개인의 일상부터 공적인 부분들까지 다채롭게 일어났다. 오늘은 우리 딸때문에 멘붕이다. 아무래도 차멀미로 인한 구토같은데... 문제는 그 구토 그 상황이 아닌 그 이후로 벌어진 나의 태도때문이었다. 나의 미약함과 죄성, 그리고 나에 대한 분노... 그런 나를 주님은 사랑하신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멘붕의 세상과 멘붕의 나... 모든 시작은 나의 멘붕에서일지 모른다. 아니... 거기서 부터다.
2012 아듀~~ 그러나 먼저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란? 아기 예수가 나신 날이죠? 하지만 우리의 주변은? 찰리 브라운은 아니... 돌아가신 슐츠님께선 찰리 브라운을 통해 자본주의의 왜곡된 크리스마스를 지적해 주십니다. 챨리 브라운을 통해 지치고 고단했던 2012년을 희망되신 그리스도로 치료하고 회복하여 우리가 바라보고 담아야 할 것들을 위해 힘을 내는 것은 어떨까요?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 그래도 볼만 합니다.) 슐츠 고마워요. 당신의 선물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2012년 언제나 그랬듯이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러운 한해이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존재의 이유가 되십니다. 아이들의 수호 성인 성 니콜라스로 유래되었지만 상업주의 속에서 태어난..
오해. 나는 종종 오해를 한다. 그래서 그 오해때문에 실망도하고 마음이 슬프기도 하다. 그런 오해가 계속 생기다보면 힘도 팽기더라. 이젠 익숙할만한데도... 어려운 건 어려운거 같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선 더더욱.
주름살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둘 늘어나는 주름살에 이야기를 묻어둔다. 주름살 사이로 손을 더듬으며, 흘러간 시간들을 더듬는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그날로 돌아가 한없이 이야기에 헤매인다. 그리고 주름살 사이에서 손을 떼는 순간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에 손을 떨어뜨린다. 고개를 떨군다. 다시 한번 그 큰 손으로 내 주름살들로 묻어난 이마를 문질러 보지만 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 질투를 느끼며 손으로 훔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