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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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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연대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까? 어떤 사건이 발생됨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이런 감정들이 연대함으로 인해 사회의 인식 지평이 더 넓어져 간다. 비록 그 과정에서 발생된 폭력과 피해들은 단지 물리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미치지만, 그 결과로 사회는 비로소 피해자의 심정에 공감하는 병렬화를 이룬다. 때로는 외부의 힘이 이런 공감의 병렬화의 확산을 폄하시키고, 조작하기도 하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는 그런 왜곡을 무너뜨리고 폭발적인 힘으로 순간적 병렬화로 나타난다. 가랑비 옷 젖듯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다수의 감정이 흔들릴만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적 일치와 공유는 일어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을 발전/진보(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록 지평이 넓어지고, 소수의 감정이 다수에게로 흘러가 ..
나의 무지를 폭로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그러나 유명한)들을 하나 둘 내 인식에 들어오면서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압력이 정당한 것은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적절하게 가지지 못했고, 그 원인이 내 무식함 뿐만 아니라 나의 게으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정당하다고 말하는 압력, 압박, 부담이 단지 내 '무능'이라는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그건 정당할 수 없다. 왜 내가 그런 압박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족함이야말로 나의 게으름과 무지를 변명하고, 오히려 부적절한 처사라고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저항의 자리에 설라치면 내 안에 들려오는 하나의 소리가 이를 제지한다. "소명"내가 어떤 일에 이미 적임자라고 지명된 그 것이 나를 압박하고..
문법의 차이. 문화라는 것은 참 신기하고 놀랍다.그리고 상호 소통하는 일은 더욱 놀랍다.거기에는 상호간의 약속된 어떤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일종의 공유지식이 되어 소통된다.그러나 외부인들에게는 그 공유지식이 매우 낯설고 불편한 것일 수 있다. 때로는 오해의 소지가 크다.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동과 서, 남과 북... 이 차이는 지리적인 것, 역사적인 것, 그리고 성 등에 따라 다르다.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정짓고 일반화한다.사회과학에 접하면서 집단으로 인식하고 일반화하려는 것에 대한 오류를 절감하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문화적 문법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가족이라는 변수. 부제: 우리의 무비판적 낙관론의 근원은 생활계획표 때문이다! 가족의 존재란 불편하면서도 나를 성찰하게하는 중요한 요소다. 아니 어쩌면 존재, 그 자체가 나인지 모를 일이다. 존재들의 하나 하나가 만드는 변수들이 조합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인 듯 싶으면서도 돌아보면 어떤 궤적을 찾아내는 그런 항해의 배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거란 신화를 나침반 삼아서 말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혈연집단의 연속성을 우리는 그리도 붙들고 있나? 답없는 질문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은 아마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의 극대화된 지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사회는 가족의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일까? 싶은 마음도 든다. 어제 2015년의 마..
공동체에 대한 미련 공동체의 회복은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가상에 근거한 네트워크를 생각할 수 있다. 공동체가 (물리적인) 지속성(유지)을 꼭 갖지 못하더라도 (정신적인)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거기에 가상 세계의 등장은 유기적 지속성의 가능성을 실현해 줄 구세주로 여겼고, 여전히 이런 신화는 여러 형태로 유지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안전과 돌봄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 가상의 네트워크를 향한 느슨한 신뢰를 경계해야 하는 점을 숙제로 안고 있다. 텍스트와 미디어를 근거한 관계성이 임상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수많은 온라인 네트워크의 관심사에 노출된 피로함때문에 쉽게 지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동체가 앞으로 짊어져야 할 가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 이 시대를 살면서 나를 구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되뇌인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가득하고 또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사유한 결과이기도 하다. 삶이란 끊임없이 부정되거나 도전받고, 구도의 길로 묘사되듯 고통의 증상이자, 그 자체일 수 있다. 붓다가 그의 성을 나서며 만난 삶의 실체에 대한 충격은 그로 하여금 구도자의 길을 떠나도록 만든다. 그리곤 종교 지도자로, 숭배의 대상으로 오늘까지 내려온다. 그는 수많은 서민들의 삶을 내려보고, 도를 전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붓다는 왕-구도자-종교지도자라는 엘리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유할 여..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리석음 지금까지 선교사로, 간사로 살면서 '노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끔 선교사들의 무리하거나 터무니없는 부탁을 응대할 때 초기에는 그나마 부드럽게 넘겼지만 짬밥이 생기면서는 감정적인 뉘앙스의 표현(일종의 가시와도 같이)을 담아내었던 것 같다. 요 며칠 서비스업에 계신 분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 특히 가족을 대동했을때, 발생된 노이즈와 부산물들을 당연하게 대하던 모습에 그동안 내가 선교사들을 대했던 태도들이 부끄러웠다. 나 역시 나름 최선을 다했노라 생각했지만 그분들(서비스업 종사자들)을 보면서 반성 또 반성을 한다. 그들의 육체 노동의 강도도 만만치 않겠지만, 스트레스를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요구하는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과거 내..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책나눔과 고민들 오늘 모임에서 논의된 부분은 표면적이지만 결국 신학의 이슈로 흘러갔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에 대한 기독교적 대처는 겉으로 볼 때, 문화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또 전쟁을 통해 쟁취할 것인지, 아니면 순응하면서 따라가는 것인지, 배척해야 하는 것인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구속적 관점을 반영하던지 하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크게 구속사적 관점과 창조신학적 관점의 맥락에서 달라질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한국 문화적 측면의 문제점, 집단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 등등에 있어서 구속사적 접근은 기독교 윤리에 근거하고, 창조신학은 사회구조적 측면(공공성)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복음주의는 이 두가지 관점을 어느정도 섞어서 바라보기 때문에 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