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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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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응원하며... 첫사랑은 언제나 어긋난다. 애니를 보다보면 이 원칙은 거의 유지되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첫사랑을 응원한다. 감정들의 엇갈림은 농염하게 익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를 이어가면서 혹시라도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양식이 될지 모른다는기대를 부여케 한다. 그래서 아프고, 또 첫사랑을 응원하게 되는 것 같다. Climber's High! in Fuuka
역사에 남을 날 2017. 3. 10. 닥치고, 치킨을 먹는 날이다.맥주는 못하니, 콜라라도 해야건만 쥬스로 대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매우 아쉽기만 했다."닥치킨데이"로 매년 기릴 것이다. 그럼에도 속이 불편한 건, 여기까지 이끈 힘이면서 동시에 가장 서운할 수 밖에 없는 "세월호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주유를 하는데, 직원 아저씨 한분이 다가오시더니 웃으시면서 '이젠 노란 리본 떼어도 되잖아요." 하셨다. 하지만 나는 뗄 마음이 없다. 아직도 세월호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길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슴에 새긴다. 닥과 세월호... 뗄래야 뗄 수 없는 것.
델리에서 길을 잃다. 그리고 고민하다. 이번에 자녀 양육과 관련하여 네팔과 인도 여정을 2년전과 같은 여정으로 기획했다. 바뀐 것은 델리까지 중국 남방항공대신 아시아나로, 일정이 네팔에서 3일 보내던 것을 일주일로 늘렸다는 점이다. 여정이 갖는 위험은 카트만두-델리-코임바토르 여정이 타이트하게 짜여졌다는 건데, 그 이유는 델리-코임바토르 라인이 직항과 경유가 혼재해서 직항을 선택하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팔 연착과 티켓을 버린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티켓을 비싸게 사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연착의 주체인 에어인디아는 책임을 회피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느낌이었고, 다른 저가 항공은 가장 비싼 값들을 불렀다. 내가 인디고(indigo)라는 항공으로 델리와 코임바토르 왕복으로 지불한 비용이 20만원 ..
2016년 가을의 여정, In Flight LJ11 ​ To HK 마치 수능추위처럼 갑작스레 날씨가 쌀쌀해진 비오는 가을끝, 겨울의 시작 이번 여행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가정주부로 스스로 두 발을 집이라는 공간에 묶어두었던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모험을 아무 생각없이 저지른 행위는 거의 재앙과도 같이 다른 가족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가정주부란 그 자리는 다른 활동을 포기한채 오롯이 집안일에만 집중하고 다른 일과 관계를 하나 둘 끊어버리는 곳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들을 돌보는 이로써의 존재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의 변덕스런 순간 순간의 기분에 반응하며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하루를 열어내는 일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일임에도, 나름 각오를 ..
서로의 연대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까? 어떤 사건이 발생됨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이런 감정들이 연대함으로 인해 사회의 인식 지평이 더 넓어져 간다. 비록 그 과정에서 발생된 폭력과 피해들은 단지 물리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미치지만, 그 결과로 사회는 비로소 피해자의 심정에 공감하는 병렬화를 이룬다. 때로는 외부의 힘이 이런 공감의 병렬화의 확산을 폄하시키고, 조작하기도 하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는 그런 왜곡을 무너뜨리고 폭발적인 힘으로 순간적 병렬화로 나타난다. 가랑비 옷 젖듯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다수의 감정이 흔들릴만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적 일치와 공유는 일어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을 발전/진보(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록 지평이 넓어지고, 소수의 감정이 다수에게로 흘러가 ..
나의 무지를 폭로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그러나 유명한)들을 하나 둘 내 인식에 들어오면서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압력이 정당한 것은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적절하게 가지지 못했고, 그 원인이 내 무식함 뿐만 아니라 나의 게으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정당하다고 말하는 압력, 압박, 부담이 단지 내 '무능'이라는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그건 정당할 수 없다. 왜 내가 그런 압박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족함이야말로 나의 게으름과 무지를 변명하고, 오히려 부적절한 처사라고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저항의 자리에 설라치면 내 안에 들려오는 하나의 소리가 이를 제지한다. "소명"내가 어떤 일에 이미 적임자라고 지명된 그 것이 나를 압박하고..
문법의 차이. 문화라는 것은 참 신기하고 놀랍다.그리고 상호 소통하는 일은 더욱 놀랍다.거기에는 상호간의 약속된 어떤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일종의 공유지식이 되어 소통된다.그러나 외부인들에게는 그 공유지식이 매우 낯설고 불편한 것일 수 있다. 때로는 오해의 소지가 크다.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동과 서, 남과 북... 이 차이는 지리적인 것, 역사적인 것, 그리고 성 등에 따라 다르다.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정짓고 일반화한다.사회과학에 접하면서 집단으로 인식하고 일반화하려는 것에 대한 오류를 절감하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문화적 문법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가족이라는 변수. 부제: 우리의 무비판적 낙관론의 근원은 생활계획표 때문이다! 가족의 존재란 불편하면서도 나를 성찰하게하는 중요한 요소다. 아니 어쩌면 존재, 그 자체가 나인지 모를 일이다. 존재들의 하나 하나가 만드는 변수들이 조합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인 듯 싶으면서도 돌아보면 어떤 궤적을 찾아내는 그런 항해의 배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거란 신화를 나침반 삼아서 말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혈연집단의 연속성을 우리는 그리도 붙들고 있나? 답없는 질문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은 아마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의 극대화된 지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사회는 가족의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일까? 싶은 마음도 든다. 어제 2015년의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