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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Life/삶의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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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장례란 보내는 이와 남은 자들이 얽혀져 묘한 내음이 있다. 집에서 장례를 치뤘던 경험있는 나에겐 요즘처럼 조용한 장례식장을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나에게 장례란 화투, 술, 그틈에서 얻는 용돈들과 음식들, 그리고 공개적인 밤샘의 놀이가 숨어있는 곳이다. 한때 퇴폐라는 것으로 보았던 그것들이 정겨운 건 고인을 환송하고 이땅에 발붙이고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야할 이들의 위로요 동네 모두가 고인을 보내는 환송의 장인 것이다. 그 떠들석한 마당 너머로 망자를 향한 거짓된 울음들이 만드는 화음은 기이하다. 그러나 그 역시 장례라는 환송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소리이자 대문 밖에 걸린 등불의 메아리다. 거한 밤이 지나 동녁에서부터 푸른 밫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이면 가마니 위로 솔솔 올라오는 한기에 더하여 움추리..
부모됨을 배우다. 부모입장에서 이번 여행은 딸에게 분명 무리인건 사실이다. 어제 우리 따님께서 보여준 몇번의 위기는 아이에게 너무 당연한거고 부모의 달램과 협박은 아이에게 무리였다는 걸 앎에도 맘대로 안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아이와 다니면서 우리 세상에 대한 나의 이기적 시선을 새삼 깨닫게 된다.
2013. 12. 기도편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정신없이 여름을 보내고 보니 벌써 겨울이네요. 돌아보면 2013년은 분주하면서도 나름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가족 이야기 Family Story 희원이 동생, 나래(태명)의 존재를 알게 된 올 해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제 가족은 둘째에 대한 기대를 담뿍 안고 시작했지만, 점점 그 자리를 3살짜리 아이를 돌보며 40대가 감당해야 할 사역들로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가을 갑작스러운 나래의 소식은 우리 소망에 대한 신실하심과 우리의 계획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둘째의..
나의 사십은 이십 대는 모험속의 스릴이었다면, 삼십 대는 나를 과시하고 싶었고, 사십은 나보다 너였다. 그래서 건축을 바라보는 눈도, 신앙의 관점도 그렇게 바뀌어가나 보다. 그래서 너와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나 보다. 강정도 살았으면 좋겠고, 밀양도 살았으면 좋겠고, 4대강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 북한도 살았으면 좋겠고, 한국에서 무시받는 이방인들도 살았으면 좋겠고, 질투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너희들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사는게 지금보다 더 기쁠 것 같다. 아직 나는 나를 더 생각하나 보다.
I am Missionary. by Loren Cunningham 로렌 커닝헴을 처음 만난 건 97년도 스위스에서였다. 그는 한국에서 온 king's kids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열정을 나누었고, 함께 예배 했다. 그 당시에 함께 있었던 몇몇 어른들은 지금은 신뢰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몇 아이들은 신실함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걷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를 몸으로 실천하는 결과다. 어떤 이는 로렌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자신을 정직하고 순결하게 다듬어가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무기삼아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조작하며, 자신의 죄를 감추며 욕심대로 살았다. (때론 거룩한 외형을 빌어서)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의 불안전함과 연약함의 위태함 속에서 그분이 내게 약속하셨고, 보..
추석 귀경길 풍경 1. 와퍼를 먹었다.
그들의 신앙을 지켜봐주자. 출처: http://etv.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E10004532233 최근 박진영씨의 이야기와 몇곡의 노래가 페북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었다. 그의 변화와 인생에 대한 질문은 분명 의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편한 하나는 기독교라는 종교적 포교 측면에서 "우월성"을 의도한 이들의 공유하기이다. 정말 기독교가 현 시대에서 우월하다면 그 우월함이 사회적으로 탁월함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의 고백 "찾고 있다"는 나그네적인 답변은 오히려 마치 답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라고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 질문으로 찾아온다. 그렇다면 너는 "행복하니?" 너의 주변은 너로 인해 "행복하니?" 성급하게 밀어대지 말자. 그냥 구도자의 삶을 살..
권력은 네트워크에 무너질 것이다. 지난 10년을 한국에 살면서 그 이전보다 배움이나 지식의 수준이 올라간 것은 내 쪽에서 갖게된 관심과 열정때문이 아니라 사회를 살면서 만난 촉발점과 그로 인해 자발적(!)으로 지식을 쏟아내고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소한 만남과 이야기가 동기가 되었고,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자발적 연결망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시민사회의 형성은 과거의 근대 교육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지식을 붙들고 이것을 권력인양 흔드는 근대주의자들은 그들이 비난하였던 전근대주의자들의 방식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 스스로 언젠가 자가당착에 직면하던지, 이를 초월하는 득도를 하게 될 것이다.